뉴욕 조선 유엔대사관 박성일 참사관의 여행주선에 따라 2009년 5월, 인공관절기, 수술기구, 수술법 책들을 두 대형가방에 가득 넣고 평양공항에 내리니 자그만 몸매의 곱고 이지적인 리화일 안내원이 체재기간 동안 함께한다고 했다. 그녀는 김일성대학 어문학과 출신으로 영어도 능통 했다. 고려호텔에서 가방들을 풀고 저녁에 그녀 따라 호텔식당 특실에 가니 민족과학기술협회 (외국과의 기술협조를 관활하는) 홍종휘 국장과 김책공대 출신 리규섭 과장의 환영만찬이었다. 남자끼리 쉽게 통하는게 군대 얘기라 1967년 철원 휴전선 군의관 복무 얘기를 하니 홍 국장도 그뒤 그 지역에서 인민군 복무한 얘기로 번졌다. 그가 1984년 9월, 남의 홍수로 수재민을 돕기위해 북이 남에 식량지원할 때 쌀 등의 무게나 부피를 가마니, 말 등을 쓰다 보니 북남 사이에 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며 뒤에 홍 국장이 국제규격으로 정리했다는 얘기도 들려줬다.
1992년, 첫 방문때 고려호텔 강당에서 내딴에는 가장 효율적인 강연을 하려는 뜻에서 북의 인공 관절수술 현실에 대해 묻는데 솔직한 답을 받지못해 그만 화를 내고 말았던 일이 되살아왔다. 공개된 자리에서 자신들의 현실을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날 밤, 내 강연을 들은 장창호 연구실장님이 호텔로 와서 그들의 현실과 인공관절기 자체제작에 대한 얘기를 나눴었다. 그랬던 장 선생님은 연상이신데 그대로 건장하셨고, 당시 정형외과장 문상민은 평양의학대학 병원장이 되어 반갑게 재회했다. ‘92년 방문때 내가 환등기를 가지고 가지 않아서 수술기법을 잘 보여 줄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비데오로 최신 수술법을 보여준뒤 수술을 하기 시작했다.
수술을 마친 한 오후,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문영호 소장이 역사연구소 위광남 실장과 리영호 연구사와 함께 찾아왔다. 웬 일인가 했더니 지난해 내 <Corea, Korea> 책을 받았다기에 말문이 곧 터졌다. 2002년부터 우리나라 로마자 국호연구를 USC 대학 Korea 도서관, Joy Kim관장의 도움으로 시작했다. 그 시절 우리나라 로마자 국호 Korea를 Corea 로 하자는 논의도 활발했다. 2003년 봄, 해외동포 이창주 교수가 마련한 독일 베르린 ‘한민족포럼’에서 나는 ‘Corea’ 어원의 역사를 발표했다. 이어 8.1일, LA에서 김상일 교수가 마련한 <Corea되찾자!> 토론회에서도 한신대 서굉일 교수와 함께 강연했고, 8월 하순엔 김일성대학 ‘영문국호 북남학술 회의’ 남측 대표가 나도 만나뵌 강만길 교수라기에 내 ‘Corea’원고를 보내 드렸었다.
수술 뒤 오후엔 리화일 동무 따라 평양의 여러 사적지와 기념비적 건물들을 살펴 보았다. 평양 떠나기 전날 저녘엔 양강호텔 근처 ‘소나무 동산’에 오르니 홍종휘 국장과 리 과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말만 들은조개구이 맛보는 날이다. 철판에 물에 적신 포대를 깔고 대합조개를 빼곡히 엎어놓고 깡통에 든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이니 불꽃이 피어 올랐다. 불이 꺼질라치면 또 뿌리며 구으니 잘 익은 조갯살에서 휘발유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그 맛이 입에 착 븥으니 ‘도라지 소주’를 마시며 관절기 자체제작 얘기를 나눴다. 김채공대와 제휴해 <생체공학연구실> 을 병원에 개설하도록 권했다. 마지막 수술을 마친 날, 함께 수술해온 박송철, 김희만 과장, 장 선생님과 정성을 다한 수술방 간호원들과도 정이 깊이 들어 아쉬운 이별을 하게 되었다.
그 저녘, 박철 참사가 와서 해외동포위원회로 가면서 그가 평양 외국어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 했다기에 촘스키 교수를 말 했더니 그의 학설이며 논리에 대해 하는 얘기가 하도 깊어서 나는 아주 질려버리고 말았다. 김관기 국장을 만나니 그는 ‘98년 내가 평양서 만난 박동근 교수와 ‘96 년에 재영동포 장민웅 회장이 마련한 런던 통일토론회에서 강연도 함께 한 분이었다. 남북 교류가 전혀 없던 80-90년대에도 유럽과 미국의 동포들은 북 학자들과 함께 만나 토론을 해왔다. 그 밤 김-박 두 분과 가장 깊은 통일관련 대화를 나눴다. 내가 연상이지만 두 분은 겸손했고 진심 어린 얘기를 나누며 박학다식의 박철은 아태평화위원인 것도 알게됐다
다음날 리화일 동무와 공항에 가니, 지난 밤에 우린 만리장성이라도 쌓았나? 김 국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뿐 아니라 6.15미국위의 내부갈등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부탁도 들었다. 드디어 지난 한 주일 매일 나와 함께 해온 화일 동무는 내가 추구하는 통일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나의 글들을 관련부서에도 전해 주는 등 크게 도왔다. 벌써 헤어지게 되자 미국식으로 다정한 포옹으로 이별의 정을 나누고 싶었지만 그저 악수하는 손에 힘을 주고 손 흔들며 비행기에 올랐다.
11월, 내 칠순 생일에 김관기 국장이 축하글을 보내왔다. 2010년 4월, 뉴욕 북 대사관 박성일 참사가 김관기 국장이 중국 심양에 나와 있는데 나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단다. 수술한 환자 중,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해서 곧 국제전화로 물었더니 그냥 보고 싶어서래요. 환자 문제가 아니어서 다행이었지만 심양이 옆집도 아닌데? 하다 언제까지 있겠냐 물었더니 ‘나 올때 까지’ 라고 능청을 떨었다. 생각해 보니 인공무릎관절기를 확보해논지라 심양에 가지고가면 6월, 북에 갈때 나머지 더 많이 가져갈 수 있기에 곧 심양행 비행기를 탔다. 김 국장은 최순철 부국장과 바빴고 저녘에야 만나 식사하며 통일관련 대화를 나눴다. 가지고 온 두 가방을 넘겨줬다.
6월, 관절기, 수술보조기와 고정제들을 가득넣고 북에 갔다. 비행기가 허용하는 대형 가방들을 끌고 다니는 걸 보고 친구들은 북으로 이민가는 거냐며 놀렸다. 인공관절기 한벌이 $ 5~ 6,000다. 인공무릎관절 뼈를 들고 수술예행 연습을 과장 선생들과 했다. 다음날부터 무릎관절 치환수술을 거뜬히 해냈다. 이런 광경을 본 문상민 병원장이 정광훈 외사지도원으로 하여금 수술실 옆방에 축하 자리를 마련케 해주셨다고 했다. 모두들 자랑스러워 과장선생과 리규섭 과장도 함께 축배를 들었다. 다행이도 내가 고안한 인공엉덩이 관절기와 부속기구들을 제작해 상품화한 회사들이 비싼 인공무릎관절기를 기증해준 덕분에 많은 수술을 할수 있었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오인동:의학박사,재미 통일운동가> <저작권자 ⓒ 국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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