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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미터 김주영 이사의 부음을 접하며

권종상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1/01/05 [00:05]

리얼미터 김주영 이사의 부음을 접하며

권종상 논설위원 | 입력 : 2021/01/05 [00:05]

 

밤새 무슨 비바람이 그리 불었는지. 어제는 그 빗속에서 온종일 일하다보니 온 몸이 흠뻑 젖었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차 안은 물론 평소엔 잘 켜지도 않는 카시트 히터도 올려 놓고 돌아와 집에 와선 뜨거운 물에 샤워 하고 술약속을 챙겨 나갔습니다. 그저 이런 날, 으스스한 몸을 좀 데우려면 보드카가 짱이죠.

시베리아 툰드라의 추위도 녹였을 스톨리치나야 보드카 한 잔을 놓고 신년맞이 비스무레한 걸 했고, 듣고 싶은 음악을 들었으며,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많이 했습니다. 지호의 가장 절친 루이스가 군대에서 휴가를 왔는데, 복귀 전에 저를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는군요. 루이스는 내년 5월에 해병대에서 제대를 하는데, 끝나고 보잉이나 시코르스키(이녀석은 헬기 관리 쪽으로 자기 방향을 틀었습니다)에서 일하거나, 혹은 경찰이나 소방관이 되는 길이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소방관이 되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아빠(루이스는 저를 아빠라고 부릅니다), 크리스마스 때 봐요~!" 내가 따라준 코냑이며 알마냑 따위를 마시고 조금 불콰해진 얼굴로 저를 꼭 끌어안아 주고 자기 집으로 향하는 루이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젊음이란 것이 가지는 무한한 가능성과 미래를 보게 됩니다. 저런 아이들에게 내가 신뢰받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습니다.

루이스를 볼 때마다 리얼미터 김주영 이사(MBN 아나운서 출신이었던, 그리고 종종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나왔던)가 떠오르곤 했습니다. 훤칠한 키, 서글서글한 웃음. 물론 성격이나 외향성 같은 건 다르겠지만, 김주영 이사가 TBS에 뜨면 여직원들이 그를 보느라 몰려온다고 공장장이 놀려대기도 했었지요.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떴습니다. 서른 네 살이란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그 무한한 가능성 하나를 잃은 것에 대해 가슴이 시립니다. 젊은이들의 죽음이란 게 마음 아픈 건, 그들에겐 '미래'라고 하는 안 열어 본 보물상자들이 가득 채워져 있는 창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자 안엔 별로 좋지 않은 게 들어있을수도 있지만, 대부분 그것들은 원석 상태의 돌로 채워져 있고, 그걸 잘 닦고 갈고 하면 빛나는 무엇인가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가득 차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할머니와 함께 산다고 했나, 전에 다스뵈이다에서 그를 인터뷰이로 삼아 김어준이 물어봤을 때 할머니를 모시고 산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런 반짝거리는 젊음 하나가 또 이 세상에서 사라졌군요. 그리고 보니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미래라는 상자를 채 다 열지 못하고 사라져 간 삶들이 얼마나 많던가요. 김용균이라는 한 젊은이가 가졌던 꿈의 상자의 무게는 그 어머니가 다 지고 가고 있습니다. 평생 그 젊음이 남긴 짐을 안고 가던 이한열의 어머니, 박종철의 부모님 생각도 납니다. 못 다 열어본 그 상자속에 들어 있던 것들을 대신 닦아 내어 이 사회를 이만큼 바꾸어 놓았지만, 그래도 그 상자의 무게는 여전할 것이기에.

우리가 세월호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더욱 아픈 것도, 그 채 못 열어 본 미래라는 보물상자 안에 들어 있는 원석의 무게가 너무 무겁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상자 안의 것들을 꺼내어 닦아 주는 것도 다 우리의 몫이 되는 것이기에 우리가 함께 분노하고 아파하는 것이지요. 거기서 나온 원석들을 깎아 보석으로 만들어 내 달라고 소리치는 이들이 많은 것은 그런 까닭일 것입니다.

김주영 이사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루이스의 건투를 빕니다. 우리가 그들의 미래를 닦아줄 만큼 닦아줘야 합니다. 그리고 못 다 이룬 꿈들에 대해선 함께 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 다 못 피우고 간 젊음들의 무게가 참 무겁게 느껴집니다. 반 세기 전 전태일의 꿈도, 그리고 현재의 수많은 김용균들도, 그리고 저리 떠난 김주영 이사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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