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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일제와 평생 비타협 한 길, 행동으로 실천한 우재룡 선생

문해청 | 기사입력 2021/03/08 [00:05]

[인물] 일제와 평생 비타협 한 길, 행동으로 실천한 우재룡 선생

문해청 | 입력 : 2021/03/08 [00:05]

우재룡 선생(1884.1.3~1955.3.3)은 국내에서 총칼로 항일 거병했고, 말을 앞세우기 보다 행동으로 먼저 실천한 무인정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02년 대한제국 군인으로 대구 진위대에 입대하여 군대해산이 이루어지는 1907년까지 5년간 근무 하던 중 정용기 산남의진 의병장을 만나 큰 감화를 받아 민족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선생은 대구 진위대에 근무하던 중 군대가 해산되자 청송의 '산남의진'을 찾아가 의병전쟁에 참여하여 연습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병사들을 훈련시켜 의진의 전투력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하였다. 

▲ 우재룡 선생



일본군과의 20여 차례 전투를 벌이며 서울 진공작전을 추진하였으나 체포되어 1908년 9월 14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내란죄’로 ‘종신유형’ 처분을 받았으나 합방특사로 풀려나게 된다. 1915년 7월 15일(음), 박상진과 함께 대구에서 ‘광복회’ 결성에 참여하여 비밀ㆍ폭동ㆍ암살ㆍ명령의 4대 행동강령을 두고 군대식으로 만든 광복회 지부와 연락기관 및 독립군 양성을 위한 사령부로서 ‘길림광복회’를 설치하고, 군자금 모집 및 친일파 처단을 통해 친일세력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1919년 9월에는 군자금 7천여원을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임시정부와 힘을 합쳐 1920년 1월 광복단결사대(조선독립군사령부) 조직에 착수, 1920년 6월 '주비단'을 조직하여 활동 중 임시정부의 ‘임시군사주비단’ 사건으로 1922년 4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1937년까지 무려 16년간의 긴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일제강점기 뜻을 같이 했던 독립운동가들을 모아 '광복회'를 재건하고, 활동을 계속하다 1955년 3월 3일(음) 대구에서 서거하셨다. 

선생은 긴 수형생활을 하면서도 일제와 타협하거나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1945년 8월 광복 후에는 광복회를 재건하고 평생 초지일관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셨다. <자료 정상규 / 정리 문해청 기자> 

「광복군 행진곡」 
- 이두산 - 달성군 화원읍 출신 

삼천만 대중 부르는 소리에 / 젊은 가슴 붉은 피는 펄펄 뛰고 / 반만년 역사 씩씩한 정기에 / 광복군의 깃발 높이 휘날린다 / 칼 짚고 일어서니 원수 치떨고 / 피 뿌려 물든 골 영생탑 세워지네 / 광복군의 정신 쇠 같이 굳세고 / 광복군의 사명 무겁고 크도다 / 굳게 뭉쳐 원수 때려라 부셔라 / 한 맘 한 뜻 용감히 앞서서 가세 / 독립 독립 조국 독립 자주 국가 세워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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