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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예감 531> 윤석열과 기시다의 배후에 바이든이 있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정치학 박사) | 기사입력 2023/03/14 [00:03]

<개벽예감 531> 윤석열과 기시다의 배후에 바이든이 있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정치학 박사) | 입력 : 2023/03/14 [00:03]

<개벽예감 531> 

윤석열과 기시다의 배후에 바이든이 있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정치학 박사)

 

<차례>

1. 한일관계 ‘정상화’를 막후에서 추진한 백악관

2. 이께다 하야또, 기시 노부스께, 나구모 신이찌로

3. 박정희와 이께다의 배후에 케네디가 있었다

4. 윤석열과 기시다의 배후에 바이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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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왼쪽부터 윤석열 대통령·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사진=연합뉴스


1. 한일관계 ‘정상화’를 막후에서 추진한 백악관

 

육군 소장 박정희(1917~1979)와 육군 중령 김종필(1926~2018)을 중심으로 결집한 군부집단이 1961년 5월 16일 반란을 일으켰다. 한국군 제1공수특전단, 해병대 제1여단 예하 1개 대대, 제6관구 사령부 직속 1개 중대, 제6군단 포병사령부 예하 3개 대대가 군사반란에 동원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1961년 당시에도 한국군 작전통제권은 미국이 장악, 행사하고 있었는데, 전차와 장갑차로 중무장한 한국군 전투부대들에 서울로 진격하라는 명령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주한미국군사령관 카터 맥그루더(Carter B. Magruder, 1900~1988)였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실권자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그는 당시 주한유엔군사령관 특별보좌관 제임스 하우스먼(James H. Hausman, 1918~1996)이다.

 

맥그루더는 겉으로 드러난 실권자였고, 하우스먼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막후실권자였다. 하우스먼은 맥그루더의 명령체계에서 벗어나 미국 국방부의 명령을 받는 막후실권자였다. 그의 공식직책은 주한유엔군사령관 특별보좌관이었지만, 실제로는 미국 국방장관 특별보좌관의 역할을 하면서 한국군을 쥐락펴락했다.

 

상황을 오판한 맥그루더는 5.16 군사반란을 반대하다가 1961년 6월 30일에 주한미국군사령관직에서 밀려났고, 5.16 군사반란을 배후에서 조종한 하우스먼은 당시 미국 국방장관 로벗 맥나마라(Robert McNamara, 1916~2009)가 수여한 공로인정서와 공로표창장을 받았다.

 

박정희-김종필 군부집단은 1961년 5월 18일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것을 설치했고, 1961년 6월 10일에는 중앙정보부(KCIA)를 설치했다. 박정희는 치렬한 권력암투를 벌인 끝에 1961년 7월 3일 육군참모총장 장도영(1923~2012)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직에서 몰아내고 의장직을 거머쥐었다.

 

제임스 하우스먼은 5.16 군사반란을 배후에서 조종한 다음, 미국 워싱턴에서 1개월 이상 머물렀다. 그 기간에 그는 박정희를 백악관으로 불러들여 당시 미국 대통령 존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를 알현하게 만드는 비밀공작을 추진했다. 당시 백악관은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김종필 군부집단을 합법정권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하우스먼이 비밀공작을 벌여 박정희의 백악관 방문을 성사시키면, 박정희-김종필 군부집단은 합법정권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국방장관 맥나마라의 특별보좌관 노릇을 하고 있었던 하우스먼은 워싱턴에 머무는 동안 미국 군부 우두머리들을 찾아다니면서 박정희의 백악관 방문이 왜 미국의 안보리익 추구에 유리한지를 설득했다. 하우스먼의 설득에 넘어간 국방장관 맥나마라는 백악관에 들어가 케네디를 설득했다.

 

설득의 요지는 무엇이었던가? 미국이 한미일 안보협력관계를 수립하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고, 한미일 안보협력관계를 수립하려면 일제 식민지 시기에 부일경력을 가진 한국군 군부세력이 집권해 한일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어 백악관은 한미일 안보협력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선행조치를 생각해냈는데, 그것이 바로 한일관계 ‘정상화’를 막후에서 추진하기 위한 음흉한 정치음모였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한일관계 ‘정상화’를 막후에서 추진한 백악관의 정치음모에 견마지로를 다해 복무하였다.

 

역사학자들은 박정희-김종필 군부집단이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다음 미국으로부터 합법정권으로 인정받으려고 박정희의 백악관 방문을 추진하였다고 보았다. 당시 박정희-김종필 군부집단이 미국으로부터 합법정권으로 인정받으려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박정희의 백악관 방문을 주동적으로 추진하고, 성사시킨 결정적인 요인은 한일관계 ‘정상화’를 막후에서 추진한 백악관의 정치음모였다.

 

백악관은 한일관계 ‘정상화’를 막후에서 추진하기 위해 정치문외한 박정희를 국제정치무대로 끌어냈다. 박정희가 워싱턴을 방문하기 전에 도꾜를 먼저 방문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백악관은 일본 종미우익세력의 우두머리에게 비밀리에 연락해 박정희의 도꾜 방문을 추진하라는 지령을 보냈는데, 그 지령을 받은 사람이 바로 기시 노부스께(岸 信介, 1896~1987)였다. 기시 노부스께는 일제가 동아시아 침략전쟁에서 패전하자 1급 전범으로 점령군에게 체포되어 도꾜전범재판에 끌려나갔으나, 미국은 교수형을 집행하기 직전 그를 석방했다. 그런 극적인 사연이 있었기에 기시 노부스께는 죽는 날까지 충심을 바쳐 미국을 섬겼다.

 

1961년 7월 하순 기시 노부스께의 밀사 신영민이 서울에 도착했다. 기시 노부스께는 박정희와 “하등의 격의 없이 이야기를 한 친한 친구”였던 신영민을 밀사로 선발해 서울에 파견한 것이다. 신영민이 박정희에게 전한 기시 노부스께의 밀서에는 한일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기 위해 박정희를 도꾜에 초청하고 싶다는 의사가 담겼다. 그것은 기시 노부스께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일본 종미우익정권의 계략이었으며, 더 나아가서 백악관의 정치음모였다.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께의 밀서를 받고 감격했다. 일본제국을 위해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하겠노라”고 맹세한 혈서를 써놓고 1940년 4월 1일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했던 부일민족반역자 박정희는 일본을 ‘사상의 조국’으로 떠받들고 있었다. 그런 일본이 자기를 도꾜로 불러주었으니 어찌 감격하지 않았겠는가!

 

1961년 8월 초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께에게 보낸 답신에 이렇게 썼다.

 

“귀하가 귀국의 어느 위정자보다 한일 양국의 견고한 유대를 주장하며 그 실현에 많은 노력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금번 귀하가 파견한 신영민 씨를 통하여 잘 알게 되었습니다. 양국의 강인한 유대는 ‘역사적 필연’이라고 주장하시는 귀하의 뜻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장차 재개될 국교정상화 교섭에 있어서 귀하의 각별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백악관은 기시 노부스께와의 비밀련락선을 통해 박정희의 도꾜 방문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1961년 9월 12일 백악관 대변인 피엘 쌜린저(Pierre Salinger, 1925~2004)는 백악관이 박정희를 초청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1961년 10월 10일 박정희는 당시 제6차 한일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도꾜에 머물고 있던 한일회담 수석대표 배의환(1904~2001)을 비밀리에 서울로 소환했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서울 장충동에 있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관에서 배의환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는 배의환에게 “미국에서 통지가 왔는데, 케네디 대통령이 나를 만나자고 한다. 그런데 방미조건으로 미국에 오는 길에 도꾜에 들러 일본 총리와 이야기를 좀 하고 오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케네디가 박정희에게 백악관으로 오기 전에 일본 총리를 먼저 만나라고 요구한 것은, 박정희가 경색된 한일관계를 원만히 풀어야 미국이 일본과 한국을 끌어들인 3자 안보협력관계를 수립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

 

2. 이께다 하야또, 기시 노부스께, 나구모 신이찌로

 

1961년 11월 11일 박정희는 워싱턴으로 가는 길에 도꾜를 방문했다. 일본 총리 이께다 하야또 (池田勇人, 1899~1965)는 도꾜에 나타난 박정희를 위해 환영만찬을 베풀었다. 박정희는 환영만찬 답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일 양국은 과거에 명예롭지 못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명예롭지 못한 과거를 들춰내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새로운 역사적 시점에서 공동의 이념과 목표를 위해 친선관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일본 종미우익정권 앞에서 일제 식민통치의 과거를 덮어버리고 미래를 지향하자고 뇌까렸던 박정희의 치욕적인 발언은 62년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2023년 3월 1일 윤석열의 3.1절 기념사에서 되살아났다. 그는 3.1절 기념사에서 “우리 역사의 불행한 과거를 되새기는 한편, 미래 번영을 위해 할 일을 생각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1961년 11월 12일 오전 도꾜에서 박정희-이께다 회담이 진행되었다. 그 굴욕회담에서 박정희는 무슨 말을 했던가? 한국은 일본과 전쟁을 벌인 당사자가 아니므로 한국의 대일배상문제를 논의해서는 안 된다는 일본의 망언에 맞장구를 치면서 대일배상청구권을 포기했다. 이께다는 박정희에게 “청구권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아무래도 (일본에서) 상쇄사상이 나오게 된다”고 말했다. 이께다가 말한 ‘상쇄사상(相殺思想)’이라는 것은 한국이 대일청구권을 자꾸 거론하면 일본도 대한청구권을 제기할 것이므로 대일청구권을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께다의 망언을 들은 박정희는 “그러면 청구권이라고 하지 말고 뭔가 적당한 이름이라도 괜찮다”고 하면서 굴복했다. 박정희와 이께다가 주고받은 구역질나는 대화를 좀 더 들어보자.

 

박정희 - “빨리 국교를 정상화해서 일본의 지도를 받고 싶다.”

이께다 - “일본이 청구권으로 지불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한국의 경제회복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무상원조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장기 저리의 경제원조를 고려하려고 한다.”

박정희 - “소비재가 아니라 자본재를 희망한다.”

이께다 - “자본재가 좋을 것이다. 소비재는 한국에서 생산하면 된다. 앞으로 한일회담과 관련해 한국 국내적으로 문제가 생겨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으면 비밀리에 내게 연락하라.“

 

청년시절에 일본제국을 위해 자기 목숨도 기꺼이 바치겠다고 맹세하는 혈서를 써서 왜적에게 바쳤던 박정희의 머릿속에는 부일민족반역사상이 차고 넘쳤다. 박정희의 변함없는 태도를 목격한 이께다는 자기 측근들에게 박정희는 “참 좋은 사람이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다”라고 칭찬했다. 박정희가 이께다 앞에서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냈으므로 이께다가 어찌 칭찬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박정희-이께다 회담이 끝났을 때, 이번에는 막후실권자 기시 노부스께가 박정희의 수고를 높이 평가하는 치하오찬을 베풀었다. 박정희는 치하오찬에서 유창한 일본말로 이렇게 지껄였다.

 

“젊은 저희들이 하고 있는 것을 일본에서 보시면, 미숙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젊은 군인들이 군사혁명을 일으킨 것은 구국의 일념에 불탔기 때문입니다. 메이지 유신 시대의 지사의 마음으로 해 보겠습니다. 저는 요시다 쇼인을 존경합니다. 국가건설과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해 부디 저희들을 도와주십시오.”

 

상상을 초월한 치욕적인 망언이어서 더 이상 옮길 수 없다. 박정희가 언급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은 일본제국주의 발흥의 이념적 기초를 다져 놓고, 일본의 조선침략을 떠들어댄 일본 우익세력의 원조다. 2006년 9월 23일 당시 일본 총리 아베 신조(安培晋三, 1954~2022)는 자기가 요시다 쇼인을 존경한다고 말했는데, 박정희는 아베 신조보다 45년 앞서 요시다 쇼인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교활한 기시 노부스께는 “국민의 박수를 받는 조약을 만들려고 하면 진정한 국교정상화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미래를 내다보는 마음으로 나서야 한다”는 충고를 박정희에게 주었다.

 

일본을 섬기는 박정희의 충성심이 변하지 않았음을 목격하면서 일본 종미우익정권의 우두머리들은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당시 자민당 총무회장 아까기 무네노리(赤城宗德, 1904~1993)는 “겸손하고 성실하다. 꾸준히 순조롭게 할 것 같다”고 하면서 박정희를 칭찬했고, 당시 통산상 사또 에이사꾸(佐藤榮作, 1901~1975)는 박정희가 “온후하고 교활함을 모르는 것 같다”고 칭찬했다.

 

박정희의 추악한 대일굴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께다와 회담을 마친 박정희는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자신이 재학했던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의 교장 나구모 신이찌로(南雲親一郞, 1886~1963)를 자신이 마련한 보은만찬에 모셨다. 이께다 하야또, 기시 노부스께를 비롯한 일본 정계 거물들과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서 박정희와 함께 재학했던 동기생 일본인들도 보은만찬에 초대되었다. 보은만찬이 시작되자 박정희는 나구모 신이찌로에게 보은의 술잔을 올리면서 일본말로 이렇게 지껄였다.

 

“저는 선생님의 지도와 추천 덕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한국 대표로서 선생님을 다시 뵙게 된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좌중에서 우렁찬 박수소리가 울려나왔다. 나구모 신이찌로에게 보은의 술잔을 올리며 머리를 조아리는 박정희의 모습을 만족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께다 하야또는 “동양의 예의사상으로 은사를 섬기고 선배를 존중하는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찬사를 연발했다.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확실하게 보여준 박정희는 30시간의 도꾜방문일정을 마치고 케네디를 알현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3. 박정희와 이께다의 배후에 케네디가 있었다

 

박정희는 1961년 11월 13일부터 17일까지 워싱턴에 머물렀다. 케네디는 백악관에서 박정희를 만나 회담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공동성명에는 미국이 “공산주의의 팽창에 대처하는 공동리익을 인정하여 군사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재확인하였다”는 문장이 들어있었다.

 

박정희-케네디 공동성명에 나오는 “공산주의의 팽창”이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그 말은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 기간에 벌어졌던 다음과 같은 군사상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 1958년 8월 23일 오후 6시 중국인민해방군은 영토완정을 실현하기 위해 대만을 공격하였다. 중국인민해방군은 개전 24시간 동안 중국 대륙 인근에 있는 진먼섬(金門島)의 대만군 진지를 향해 50,000발의 포사격을 맹렬히 퍼부었다. 1958년 9월 5일부터 한 달 동안 중국인민해방군이 진먼섬에 계속 퍼부은 포탄은 총 474,000발에 이르렀다. 1958년 9월 24일 중국인민해방군 J-5 전투기 100여 대가 진먼섬 상공으로 출격해 대만 공군 전투기들과 치렬한 공중전이 벌였다. 당시 중국은 대만해방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했지만, 미국에 있어서 중국의 대만해방전쟁은 악몽이었다.

 

2) 1960년 1월 7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서 소련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능력에 대한 정보평가가 논의되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정보보고에서 소련이 1963년까지 미국 본토를 타격할 대륙간탄도미사일 50발을 보유할 것으로 예상했고, 미국 공군은 소련이 1963년까지 미국 본토를 타격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800발 이상 보유할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에 있어서 소련의 압도적인 대륙간탄도미사일 능력은 소름끼치는 악몽이었다.

 

3)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조선인민군과 한미련합군 사이에서 총 90차례의 소규모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1958년 3월 6일 조선인민군 고사포병들은 비무장지대 상공으로 날아든 주한미공군 소속 F-86 전투기 1대를 고사포로 격추했다. 미국에 있어서 조선의 ‘남조선해방전쟁’은 악몽이었다.

 

4) 1961년 1월 24일 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골즈보로 상공을 날던 미국 공군 B-52 전략폭격기의 오른쪽 날개가 갑자기 파손되면서 지상에 추락했다. B-52 전략폭격기에 실렸던 3.8메가톤급 ‘마크(Mark) 39’ 수소폭탄 2발은 기체가 추락하면서 심하게 요동치는 바람에 기체 밖으로 튕겨나갔다. 히로시마 핵폭탄보다 300배 더 강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수소폭탄들이다. 1발은 비상락하산이 자동으로 펴졌지만, 다른 1발은 비상락하산이 펴지지 않아 그대로 떨어졌다. 비상락하산이 펴지지 않은 채 떨어진 3.8메가톤급 수소폭탄은 놀랍게도 안전장치가 풀려있었다. 수소폭탄은 순식간에 지상에 떨어졌다. 안전장치가 풀려있었는데도 기적적으로 폭발하지 않고, 5.48m 땅속에 들어박혔다. 만일 히로시마 핵폭탄보다 300배나 더 강한 파괴력을 지닌 수소폭탄이 터졌더라면, 백악관은 형체도 없이 날아갔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존 케네디가 대통령에 취임한 날로 때로부터 사흘이 되었던 날이었는데, 그는 대통령에 취임한지 사흘 만에 수소폭탄 대폭발로 죽을 뻔했다. 이 엄청난 충격사건은 백악관에 핵참화의 악몽을 안겨주었다.

 

박정희-케네디 공동성명에 나오는 “공산주의의 팽창에 대처하는 공동리익”이라는 것은 미국이 조선, 중국, 로씨야와 대결하기 위해 한일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고, 더 나아가서 한미일 안보협력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필요성을 절감한 미국은 박정희의 대일굴종을 이용한 비밀공작을 감행했다. 세월이 멀리 흐르는 동안 하나 둘씩 기밀해제된 미국의 비밀문서들에서 박정희의 대일굴종을 이용한 미국의 비밀공작이 윤곽을 드러냈다. 윤곽은 다음과 같다.

 

1) 1962년 7월 31일 미국 국무부는 주한미국대사관과 주일미국대사관에 각각 비밀전문을 보냈다. 비밀전문에는 “미국이 모든 자원을 동원해 한일협상이 타결되도록 압력을 넣고, 필요하다면 박정희와 일본 총리 사이에서 비밀메시지를 전달하는 등 중재역할을 하라”는 지시가 담겼다.

 

2) 1963년 당시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 1908~1973)은 백악관에서 박정희와 회담하는 중에 “한일관계 정상화는 동아시아의 안정에 커다란 공헌을 할 것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한일관계 ‘정상화’를 재촉했다.

 

3) 1964년 2월 28일 당시 미국 국무장관 딘 러스크(Dean D. Rusk, 1909~1994)는 주미한국대사 김정렬에게 “한일관계 정상화는 한국에 경제적으로 큰 이익이다. 현 정세는 한일회담을 타결하기에 유리하다. 타결은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고 하면서 한일관계 ‘정상화’를 재촉했다.

 

4) 1965년 4월 29일 당시 미국 국무부 차관보 윌리엄 번디(William P. Bundy, 1917~2000)는 박정희가 미국을 방문하기 전에 한일협정을 타결하기를 강력히 요구하는 비공개 메시지를 전하면서 박정희를 압박했다.

 

미국은 1951년부터 1965년까지 15년 동안 한일관계 ‘정상화’를 막후에서 추진하기 위해 광분했다. 결국 1965년 6월 22일 도꾜에서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되었다. 미국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한일관계를 ‘정상화’시켰지만, 그 험난한 과정에 내몰린 한국은 일본에 대한 사죄도 배상도 보상도 모두 포기하는 뼈아픈 굴욕을 겪어야 했다. 한국이 일제의 식민통치범죄에 대한 사죄를 받아내지 못하게 만들었고, 식민통치범죄에 대한 배상도 청구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식민통치피해에 대한 개별보상마저 청구하지 못하게 만든 장본인은 박정희와 이께다의 배후에서 움직인 케네디였다.

 

4. 윤석열과 기시다의 배후에 바이든이 있다

 

2023년 3월 6일 윤석열 정부는 일제 식민지 시기 강제징용을 당한 조선인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해주겠다는 이른바 ‘강제징용 피해 해결안’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저들이 말하는 ‘강제징용 피해 해결안’은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에게 판결금 및 지연리자를 지급해주겠다는 것이다. 강제징용범죄를 저지른 일본 전범기업들인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제철로부터 공식사죄를 받아내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범기업들에게서 마땅히 받아내야 할 배상금조차 포기하겠다는 실로 추악한 망동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런 추악한 망동을 두고 “미래 지향적인 한일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결단”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가 일본 정부 및 일본 전범기업의 공식사죄를 받아내는 것을 포기하고, 배상금조차 포기한 것은 일제의 강제징용범죄를 용인해주는 것이며, 강제징용범죄를 부정해보려고 미쳐 날뛰는 일본 우익정권 앞에서 무릎을 꿇는 대일굴종이다. 윤석열 정부가 일본 우익정권에 굴종하여 일제의 식민통치범죄를 부정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항일운동사 자체를 부정하는 극악한 부일민족반역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괴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윤석열 정부가 기시다 정부에 굴종하여 ‘강제징용 피해 해결안’이라는 것을 발표한 이튿날인 2023년 3월 7일 백악관은 윤석열 대통령을 오는 4월 26일 국빈으로 초청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것은 우연한 시간적 일치가 아니었다. ‘강제징용 피해 해결안’이 어느 날 발표되는지를 미리 알고 있었던 백악관은 ‘강제징용 피해 해결안’이 발표되는 때에 발맞춰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일정을 발표한 것이다.

 

괴이한 현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백악관이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일정을 발표한 날로부터 이틀이 지난 2023년 3월 9일 기시다 정부는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일정을 발표했다. 발표에 의하면, 윤석열 대통령은 2023년 3월 16일 일본을 방문해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다는 것이다. 기시다 정부는 백악관이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일정을 발표하기를 기다렸다가 방미일정이 발표되자마자 그에 발맞춰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일정을 발표한 것이다.

 

‘강제징용 피해 해결안’이 발표된 것을 전환계기로 하여 바이든, 기시다, 윤석열 3자가 손발을 척척 맞추며 붙어 돌아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이런 기이한 현상은 묘한 기시감(旣視感)을 불러일으킨다. 1961년에 케네디, 이께다, 박정희 3자가 손발을 척척 맞추며 붙어 돌아갔던 과거사와 동일한 현상을 다시 보는 것이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1961년에도 백악관은 박정희를 백악관으로 초청하면서 워싱턴에 오는 길에 도꾜에 들러 이께다 하야또를 만나라고 요구했고, 박정희는 그 요구를 충실히 따랐었다. 그로부터 62년이 지난 오늘 조 바이든(Joseph R. Biden)은 윤석열을 백악관으로 초청하면서 워싱턴에 오기 전에 기시다 후미오를 만나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제 내막이 드러난다. 1961년에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도 백악관은 한미일 안보협력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비밀공작을 막후에서 벌이고 있다. 윤석열 정부로 하여금 ‘강제징용 피해 해결안’이라는 것을 발표하게 막후에서 종용한 백악관은 윤석열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 해결안’을 발표한 것을 전환계기로 삼아 한일관계 ‘정상화’를 막후에서 추진하고, 더 나아가 한미일 안보협력관계를 수립하려고 암약하는 것이다. 이런 내막을 파헤치면, 윤석열 정부의 부일반민족행위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의 부일반민족행위 뒤에서는 한미일 안보협력관계를 수립해보려고 암약하는 백악관의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백악관이 한미일 안보협력관계를 수립하는 목적은 조선, 중국, 로씨야와 대결하려는 데 있다.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1961년에는 소련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능력, 중국의 대만해방전쟁 의지, 조선의 ‘남조선해방전쟁’ 의지가 각각 강해지면서 미국이 위기감을 느꼈는데, 오늘 어떠한가? 2023년 3월 현재 중국은 미국에 맞설 수 있는 강대한 국력을 가지고 영토완정을 실현하기 위한 대만해방전쟁 준비를 완료했으며, 조선도 강력한 핵무력을 가지고 영토완정을 실현하기 위한 ‘남조선해방전쟁’ 준비를 완료했으며, 로씨야도 노보로씨야해방전쟁를 승리로 이끌어 영토완정을 실현하는 중이다. 이것이야말로 미국의 숨통을 조이는 형세가 아닐 수 없다.

 

조선, 중국, 로씨야 3대 핵강국이 미국의 숨통을 시시각각 조이는 것은 미국이 건국 이래 처음 당하는 치명적인 위기다. 이전에도 미국에게 치명적인 위기가 닥쳐왔지만, 미국은 그때마다 용케도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국력이 약해져 자기에게 닥쳐온 치명적인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위기탈출구는 없으므로, 미국은 꼼짝 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다.

 

정말로 다급해진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위기상황으로 와락 끌어들여 조선, 중국, 로씨야와 대결하는 한미일 안보협력관계를 수립하려는 책동을 벌이고 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윤석열 정권과 기시다 정권은 백악관의 요구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면서 미국의 한미일 안보협력구상을 떠받들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한미일 안보협력구상을 실현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왜냐하면 조중로 3자의 군사력이 한미일 3자의 군사력을 이미 능가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허장성세만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군사력이 이전처럼 여전히 강하다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환각이다.

 

첨단무기를 자랑하는 미국군이 원시무기밖에 갖지 못한 탈레반과 싸운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 어이없게 패하여 2021년 8월 30일 방대한 분량의 무장장비를 전부 내던지고 황망히 퇴각한 것만 봐도 요즈음 미국의 군사력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알 수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이 문제와 관련하여 몇 가지 사례를 더 살펴보자.

 

1) 2021년 10월 26일 미국 외교전문지 ‘대외정책(Foreign Policy)’ 분석기사에 의하면,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즉각 싸울 수 있는 즉시전투태세(fight tonight)를 갖춘 미국군은 14%에 불과하다고 한다. 현대전의 승패는 선제타격으로 결정되는데, 선제타격을 받고서도 14%에 이르는 전투병력만이 즉시 반격에 나설 수 있는 미국군의 한심한 실태는 그들이 선제타격을 받고 패할 것이라는 점을 예고해준다.

 

2) 2023년 3월 8일 미국의 유력한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 보도에 의하면, 요즈음 미국의 무기생산능력이 매우 약화되는 바람에 신형 미사일, 신형 전투기, 신형 무인작전기를 생산하려면 15년 이상 걸리고, 구형 작전헬기를 신형으로 교체하는데 10년, 구형 중거리 공대공미사일을 신형으로 교체하는 데 20년, 구형 항공모함을 신형으로 교체하는 데 44년이 걸린다고 한다. 미국의 무기생산능력 이렇게 쇠락한 것을 보면, 오직 무기에만 의존하는 미국의 군사력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종미우익사상에 눈이 멀어버린 윤석열 정부와 기시다 정부는 미국이 시키는 대로 복종하면서 미국이 처한 치명적인 위기상황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 한국과 일본이 미국과 함께 치명적인 위기상황에 깊숙이 빠지면, 미국이 선제타격 치명상을 입고 쓰러지는 날, 미국과 함께 쓰러질 것이 뻔하다. 백악관이 추진하는 한미일 안보협력구상은 3자의 동반몰락을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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