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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대백제전!중국지역 경영한 백제역사 부정하는 사학계는 퇴출시켜야 한다!

백제시조 온조무덤은 하남시에서 찾아야!서울 석촌동 피라미드무덤 주인은 근초고대왕

윤복현 | 기사입력 2023/09/25 [00:03]

2023대백제전!중국지역 경영한 백제역사 부정하는 사학계는 퇴출시켜야 한다!

백제시조 온조무덤은 하남시에서 찾아야!서울 석촌동 피라미드무덤 주인은 근초고대왕

윤복현 | 입력 : 2023/09/25 [00:03]

2023대백제전이 고구려에게 참수당한 개로대왕의 아들인 문주대왕이 서울에서 천도한 공주(웅진)에서 개막되고 성왕이 천도한 부여에서 폐막합니다.

 

백제국조 온조는 어머니 소서노가 고구려의 제후인 '어하라'로 책봉받아 다스렸던 지금의 요서지역에서 100가를 배를 태우고 마한(한반도)의 인천에 도착하여 서쪽으로 바다가 있고 동쪽으로는 험한 산이 보호하며 토지가 비옥한 한강이남지역인 지금의 하남시에 위례성을 쌓고 백제의 터전을 잡았습니다. 온조대왕의 무덤은 지금의 하나시에서 찾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참조영상: 하남 위례성 https://youtu.be/30PkkrigZ_U , 온조대왕릉 https://youtu.be/tWvqbwuHa94

 

▲ 동아시아 최대규모의 토성-서울 풍납토성 

 

고구려의 고국원대왕을 전사시키고 한강변에서 군대를 사열한 근초고대왕은 한강변에 동아시아 최대규모의 궁성인 풍납토성을 쌓고 마한을 통합하고 한강을 따라서 서해로 나가 요서지역을 차지하고 열도의 왜세력을 백제동맹군으로 만들어 동아시아 해상강국을 실현합니다.

 

 

▲ 서울 석촌동 백제초기 피라미드 무덤(주인은 백제정복군주 근초고대왕으로 추정된다). 부여는 땅 속에 묻고 흙으로 덮는 토광묘이지만 고구려가 건국된 압록강지역의 맥족이 사용한 무덤은 적석총이였다. 따라서 소서노.비류.온조를 따라 나온 맥족의 무덤은 적석총일수 밖에 없다.

 

서울 강남의 석촌동은 백제초기 고구려양식의 석관묘가 200여기가 존재한 지역으로 석촌동의 가장 큰 피라미드무덤의 주인은 한성백제시대의 최고의 정복군주였던 근초고대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조가 터전을 잡은 한강지역의 한성백제는 400년간 유지하다가 고구려 장수태왕 때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서 백제 개로대왕이 참수당한 후에 백제는 지금의 공주로 천도하여 2의 백제중흥시대를 열였습니다.

 

열도를 통치하던 백제 좌현왕으로 개로대왕의 동생인 곤지의 친아들인 동성대왕은 중국동해안지역을 경영하였으며, 개로대왕의 친아들로 작은 아버지 곤지가 양아들로 열도에서 키운 무녕대왕은 동성대왕이 시해당한 후에 열도에서 건너와 백제대왕에 즉위하여 백제문화부흥시대를 열었으며, 백제성왕은 신라와 군사동맹으로 고구려를 몰아내고 한강지역을 회복했으나 신라가 한강지역을 차지하자 신라와의 전쟁과정에서 전사하였습니다.

 

백제 의자대왕은 40여개의 신라 성을 함락시키며 신라를 망국위기로 몰아 넣었으나 신라에서 보낸 간자들에 놀아난 나머지 백제 충신들을 죽임으로써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한민족 정통사서[환단고기]는 백제의 시초와 건국과정을 자세히 알려 줍니다.일제 식민사관과 중공의 동북공정사관이 지배해온 대한민국 사학계가 백제개국에 대해 정리를 못하는 것은 [환단고기]를 위서취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충청도에서 발견된 고구려불상에 새겨진 고구려 장수태왕의 연호(건흥)가 세상에 알려지기 전에 [환단고기]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 태왕들의 연호(고구려국조인 고추모 태왕의 경우 연호는 '다물')와 광개토태왕비문에 새겨진 17세손 광개토태왕의 족보의 비밀(광개토태왕은 부여건국자 해모수의 직계 17세손)을 밝혀 주고 대진국발해 황제들의 연호까지 기록하고 있는 [환단고기]는 절대 위서가 아닙니다.

[환단고기]가 기록하고 있는 백제의 시초와 건국

1.부여 동명왕(고두막 한)의 손녀 소서노와 두 아들의 자립

동부여에서 부여로 망명하여 소서노 부여공주와 혼인하여 부여왕에 즉위하고 국호를 고조선의 제후국으로 국조 단제왕검의 차남인 부소 황태자가 1대 왕에 임명되었던 조상의 나라이름인 고리(고려)로 바꾼 <<고추모(주몽)이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 만약 적자 유리가 오면 마땅히 태자로 봉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서노는 장차 자신의 두 아들(비류와 온조)에게 이롭지 못할 것을 염려하다가. 경인년(BCE42년) 3월에 사람들에게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달려가 진,번 사이에 있는 바다 가까운 외진 땅에 이르렀다.>>

기록에서 <<남쪽으로 달려가 진,번 사이에 있는 바다 가까운 외진 땅에 이르렀다.>>는 내용은 고추모가 천도한 장춘지역에서 남쪽으로 이주하여 고조선의 진한과 번한의 경계지역인 지금의 대릉하 하류지역에 이르러 정착했다는 의미입니다.

2.고구려의 제후국인 '어하라'로 책봉된 소서노와 비류의 계승

[환단고기]에 기록되기를,<<그 곳에 산지 10년 만에 밭을 사서 장원을 두고 재산을 모아 수만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따르는 자가 많았다. 남으로 대수에 이르고 동으로 큰 바다에 닿는 5백리 되는 땅이 모두 그의 소유였다.

그리고 주몽제에게 사람을 보내어 글을 올려 섬기기를 원한다고 했다. 임금이 매우 기뻐하고 칭찬하며 소서노를 책봉하여 '어하라'라는 칭호를 내렸다. 13년 임인년에 이르러 소서노가 세상을 떠나고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기록에서 << 남으로 대수에 이르고 동으로 큰 바다에 닿는 5백리 되는 땅이 모두 그의 소유였다.>>는 기록은 소서노가 해상무역을 통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고 지금의 요서지역에 해당하는 500여리에 이르는 영토를 확장했다는 의미입니다. 한반도 서울지역에 터전을 잡은 백제가 소서노가 경영했던 요서지역을 회복한 이유가 되겠습니다.


3.온조의 백제건국

[환단고기]에 기록되기를<<이 때 마려 등이 온조에게 이르기를 “ 신들이 듣기를 마한의 쇠망이 임박하였다 하니 가서 도읍을 세울 때라 생각하옵니다” 하니 온조가 “좋다”며 허락하였다. 이에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먼저 마한의 미추홀(지금의 인천부근)에 이르러 사방을 돌아 다녀 보았으나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오랜 뒤에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주: 북악산)에 올라 살만한 땅을 찾앗다. 그 때 마려 , 오간 등 신하 열명이 간하였다. “오직 이곳 하남 땅은 북으로 한수를 끼고 동으로 높은 산이 자리잡고 있으며 남쪽으로 기름진 평야가 열려있고 서쪽은 큰 바다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곳은 하늘이 만든 험한 지형과 땅의 이로움이 얻기 어려운 형세이오니 , 마땅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른 곳을 더 찾기 마옵소서”온조가 신하 열명의 의견을 쫓아 드디어 하남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라 하엿다. 백 사람이 건너왔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뒤에 비류가 세상을 떠나자 그 신하와 백성이 그 땅을 바치며 복종했다. >>

 

 

 

 
4.백제는 서해를 건너 중국동해안지역을 차지하고 다스렸던 동방의 로마제국


​"백제의 영토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고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 고구려 국경까지 남쪽은 왜국에 이른다. 백제는 동(한반도),서(중국대륙) 두 곳에 서울을 두고 있다."-[구당서] <백제전>


"백제왕은 동,서의 두성에서 거주하는데, 동쪽 성은 웅진(한반도 충청도)로서 당시 국왕의 제2의 수도였다. 서쪽 성은 지금의 부여현이니 양나라때 명농왕이 이 산성에서 살았으며 성산으로도 사용하고 산동 영성현 동쪽에 있다." -[신당서 각외국전 지리고증] <대청제국 말기학자 정겸>

"백제는 군현을 담로'라고 부른다. 백제에는 22개의 담로가 있어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웅거하게 하였다."[양나라/양직공도]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시에 강한 군사가 100만이고 남으로는 오(吳), 월(越)의 나라를 침입하였고,북으로는 유주,연,제,노나라를 휘어잡아 중국의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삼국사기] <최치원전>

"백제국이 진대로부터 시작하여 송, 제, 양대에 양자강 좌우를 차지하고 있었다." -[북사] <백제전>

"이 해에(서기490년) 위나라(북위)가 또 기마병 수십만명을 징발하여 백제 국경선에 침공했으나, 모대가(동성왕)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 장군에게 군사를보내 위나라 군사를 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남제서 권58] <동남이전 백제편>(양나라 숙자현)

"백제 동성왕이 광양태수를 고달로,대방(중국 화북지역)태수로 조선태수를 양무로,광릉태수를 회매로, 청하태수를 모견으로, 조선태수 양무를 광릉태수로, 낙랑태수를 왕무로 임명하여 중국 남조에 승인을 요구하였다. 황제는 모두 들어 주었다."-[남제서] <백제전>

"백제국이 양자강 어구를 좌안을 진대로부터 시작하여 송, 제, 양대에 이르기 까지 점령하고 있었고, 후위때에는 중원을 차지하였다."-[주서 49권] <백제전>

그리고 지금의 요동과 요서는 거란족이 건국한 요나라 시기이고,고구려.백제시대의 요동은 난하 이북지역이고, 요서지역은 난하 이남지역을 의미합니다.따라서 고구려와 백제가 차지한 요동과 요서를 지금의 요동과 요서지역으로 이해하는 사학자들은 사학자의 자격이 전혀 없는 자들인 이유입니다.

*[환단고기/태백일사]에 기록되어 있는 대륙백제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제 노. 오. 월의 땅을 평정하고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의 작위를 나누어 봉하고 험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군역과 세금과 특산물 납부를 모두 본국에 준하여 하게 하였다."


"요서 땅에 백제의 영지가 있었는데, 곧 요서,진평이고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으니 여기에 소속된 현은 첫째 산음, 둘째 산월, 셋째 좌월이다. (21세 고구려 문자제)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쳐서 취하고 군현의 이름을 바꾸어 송강,회계,오성,좌월,산월,천주라 하였다.

"명치(고구려 문자태왕의 연호) 12년에 신라 백성을 천주(홍콩지역)로 옮겨 그 곳을 채웠다. 이 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므로 군대를 보내어 요서,진평 등의 군을 쳐서 빼앗으니 백제군이 없어지고 말았다."


수많은 중국사서들의 기록과 [환단고기]기록내용은 정확히 일치하고 있기때문에 백제가 본국의 기준에 맞추어 호구조사를 하고 세금까지 거두면서 중국대륙을 통치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고 있고, [환단고기]가 절대 위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이유입니다.

 

한신대 신학과 졸업
부천YMCA 중.고등부 교사
육군 3사단 백골부대 병장 전역
한신대 신학대학원 졸업(석사논문:한민족의 하느님신앙과 종교다원적 상황의 선교적 과제)
역사.종교연구가/심리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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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석재 2023/09/25 [09:53] 수정 | 삭제
  • 백제 흥망지가 한반도 중앙의 서울이라는 주장은 명백한 조작.식민사관이고 동북공정 논리를 선전.홍보하는 것입니다.
    경도 기록과 같이 백제는 오른쪽 곧 서쪽에 발해가 있었으며 이 발해는 지금의 란하 최하류의 만灣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백제흥망지는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강안지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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