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뉴스=고경하 기자] 대구이육사기념사업회(정대호 상임대표)는 26일 혁신공간 바람 상상홀에서 안도현 시인을 초청해 “작가와 만남, 우리는 어떻게 시에 다가가는가?” 강의를 개최했다.
김용락 사무총장의 사회로 동휘가수의 식전행사 노래공연과 정대호 상임대표 인사말로 시작되었다.
이날 참가자는(존칭생략) 김산, 남원환, 정대호, 김용락, 성희, 박경조, 고경하, 박재진, 이형국, 등 55여명이 참석했다.
안도현시인은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198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소월시문학상, 백석문학상, 석정시문학상 등 수상,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 』, 『북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등 이 있다.
다음은 강의 전문
우리는 어떻게 시에 다가가는가?
1.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는 결별하라
상투성의 그물
만약에 당신이 ‘가을’을 소재로 한 편의 시를 쓴다고 치자. 당신의 머릿속에 당장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도 가을의 목록은 십중팔구 ‘낙엽 ․ 코스모스 ․ 귀뚜라미 ․ 단풍잎 ․ 하늘 ․ 황금들녘 ․ 허수아비 ․ 추석’과 같은 말들일 것이다. 이런 말들이 당신의 상상력을 만나기 위해 머릿속을 왔다 갔다 할 것이다.
그러다가 낙엽은 ‘떨어진다’는 말로 연결되고, 코스모스는 ‘한들한들’이라는 의태어를 만나고, 귀뚜라미는 ‘귀뚤귀뚤’이라는 의성어와 결합하며, 단풍잎은 ‘빨갛게’ 물이 들 것이며, 하늘은 ‘푸른 물감을 뿌리다’는 문장과 조우하며, 황금들녘은 풍요의 이미지를 데리고 올 것이며, 허수아비는 반드시 ‘참새’를 불러들이고, 추석은 ‘보름달’로 귀결될 것이다.
이렇게 한심한 조합으로 시의 틀을 짜려고 한다면 그 순간, 그때부터 당신의 시는 망했다고 보면 된다. 발버둥을 쳐도 소용없다. 당신의 시는 상투성의 그물에 스스로 갇힌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상투성은 시의 가장 큰 적이다. 그것은 대상을 피상적으로 인식하면서 생기는 마음의 독버섯과 같다. 겉은 멀쩡한데 우리의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독을 품고 있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상투적이란, 마치 그것이 자연스러운 듯, 마치 어떤 기적으로 거듭 나타나는 단어가 여러 가지 이유로 각각의 경우마다 적당하다는 듯, 마치 모방하는 것은 더 이상 모방으로 감각될 수 없는 듯, 어떤 마력도 어떤 열광도 없이 반복되는 단어’라고 말했다. 동어반복을 지적한 것이다.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도 그 반복의 지겨움을 깨우치지 못하고 그 반복이 진리라고 믿는 게 상투성의 원리다. ‘기계적인 우리들의 삶 속에 파묻혀 있는 세계를 관찰하고 느끼고 그것을 언어로 드러내는 일’을 오규원은 ‘미적 인식’이라는 말로 명쾌하게 정리한 바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재라고 하더라도 시인의 미적 인식에 의해 재발견되지 않으면 그것은 시라고 할 수가 없으며 죽은 인식의 되풀이에 불과하다. 죽은 인식은 죽은 언어를 불러온다. 시인의 가장 큰 임무 중의 하나는 죽은 언어를 구별하여 과감히 버리고 살아 있는 언어와 사투를 벌이는 일이다.
연탄 이야기를 잠시 하자. 언제부터인가 내 이름 앞에 슬그머니 ‘연탄시인’이라는 말이 붙어 다니는 것을 보았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나무시인’이나 ‘풀잎시인’이 아니고 하고많은 소재 중에 왜 하필이면 연탄이란 말인가.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 전문
아마도 이 시를 비롯해서 연탄을 소재로 몇 편의 시를 쓴 탓일 게다. 애초에 나는 연탄을 소재로 타인에 대한 사랑이나 희생을 쓰려고 했던 게 아니다. 나는 연탄을 내세워 ‘가을’에 대해 쓰고 싶었다. 아니, ‘가을’을 쓰려고(‘가을’을 내 방식으로 인식하려고) 연탄을 끌어들였다는 말이 맞겠다. 옛날에는 여름의 뜨거운 기운이 꺾일 때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연탄이었다. 연탄을 실은 트럭과 리어카가 거리와 골목을 누비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가을이었다.
어릴 적에 내 자취방 부엌에는 늘 연탄이 있었다. 낯선 도시에서 내가 처음 배운 것은 자취방의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고 제때 갈아주는 일이었다. 연탄의 붉고 푸른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구들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나는 자주 바라보았다. 그 불꽃으로 밥과 국과 라면을 끓였고(몇 번이나 라면 냄비를 뒤엎었고), 양말과 운동화를 말렸고, 양은찜통에다 밤새 물을 데워 아침에 머리를 감았다.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 연탄을 갈았고, 연탄구멍을 정확하게 맞추려고 잠이 가득 찬 눈을 비볐고, 그리고 연탄가스를 맡지 않으려고 몇 초 동안은 숨을 참아야 했다.
언덕 위에 있던 그 자취방을 나와 학교로 가려면 가파른 길을 내려가야 했다. 겨울이면 눈 녹은 물이 비탈길을 빙판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런 아침에는 누군가 어김없이 비탈길에 연탄재를 잘게 부수어 뿌려놓곤 했다. 그 고마운 분이 누구인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이 세상에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일찍 일어나는 분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연탄은 내게 두 가지의 의미를 한꺼번에 선물했다. 하나는 가을이라는 계절을 인식하는 소재로, 또 하나는 타인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상징으로 나에게 온 것이다.
세계와의 불화
초등학생들에게 동시를 가르치는 교실에서도 문제는 수없이 발견된다. 2학년 1학기 『쓰기』 교과서에는 말의 재미를 느끼게 하기 위해 반복되는 말이나 흉내 내는 말을 써보라고 하는 단원이 있다. 당신 같으면 다음 괄호 안에 어떤 말을 넣을 것인가?
‘토끼는 ( ) 뛰어간다.’
물론 정답은 ‘깡충깡충’이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 중에 과연 토끼가 깡충깡충 산을 뛰어오르는 모습을 본 아이가 몇이나 될까? 아이들은 대부분 동물원이나 토끼장에서 ‘엉금엉금’ 기어가는 토끼를 본 게 전부일 것이다. 이런 기계적인 동시교육은 ‘시냇물은 졸졸졸’ ‘새싹은 파릇파릇’ ‘흰 눈은 소복소복’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시라는, 매우 잘못된 생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표현의 경직성은 사고의 경직성으로 옮아간다. 아이들의 말랑말랑한 머리를 딱딱하게 만드는 이런 나쁜 동시교육을 이제는 한시바삐 집어치워야 한다.
‘미美는 언제나 엉뚱하다’고 한 보들레르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당신이 다다르고자 하는 미적 인식을 위해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을 창작의 신조로 삼으라. 이문재는 문학청년 시절 ‘문학개론’ 첫 시간에 노교수가 ‘문학은 인생이다’라는 문장을 칠판에 쓰는 걸 보고 강의실을 뛰쳐나가고 싶었다고 한다.(「내가 만난 류시화」,『시와시학』, 2004년 봄호)
이런 행위를 단순히 문학청년의 치기로 볼 수만은 없다. ‘시적인 것’을 찾으려는 탐색의 정신은 혼돈과 암흑을 깨뜨리는 파천황의 정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니 당신이 늘 보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라. 소소한 것에서부터 삶의 기미를 포착하고 파악하는 습관을 길러라. 사물을 반듯하게 보지 말고 거꾸로 보라. 세상을 걸어 다니면서 보지 말고 때로는 물구나무를 서서 바라보라. 지금부터는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것들을 의심하고, 아름답다고 여기던 것들과 끊임없이 싸우고,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는 결별을 선언하라.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한 순간도 미적 인식에 다다를 수 없게 된다.
거창 학동 마을에는 바보 만복이가 사는데요 글쎄 그 동네 시내나 웅덩이에 사는 물고기들은 그 바보한테는 꼼짝도 못해서 그 사람이 물가에 가면 모두 그 앞으로 모여든대요 모여들어서 잡아도 가만 있고 또 잡아도 가만 있고 만복이 하는 대로 그냥 가만히 있다지 뭡니까. 올 가을에는 거기 가서 만복이하고 물가에서 하루종일 놀아볼까 합니다 놀다가 나는 그냥 물고기가 되구요!
정현종의 「바보 만복이」 전문이다. 이 무슨 말인가? 바보가 물고기를 꼼짝 못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는 말은 만복이가 바보가 아니라는 말이다. 즉 남들이 그의 (어수룩한 외모나 모자라는 지능이나 우스운 이름을 보고) 바보라고 놀리고 업신여기지만 실제로 만복이는 물고기라는 자연과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이다. 시인은 만복이하고 놀고 싶다는 말을 숨기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도 은근히 일상적 시각을 바꾸고 고정적 관념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놀다가 물고기가 되겠다고 마지막 행에서 (어처구니없게도) 말한다. 남들은 바보라고 하지만 진실은 바보가 아닌 만복이의 편에 서는 것, 이것이 시인의 길이다.(합리적 이성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그리하여 시인을 또 바보라고 하겠지)
내 몸의 사방에 플러그가 빠져나와 있다 탯줄 같은 그 플러그들을 매단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비린 공기가 플러그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몸 밖에 플러그를 덜렁거리며 걸어간다 세계와의 불화가 에너지인 사람들 사이로 공기를 덧입은 돌들이 둥둥 떠다닌다
이원의 「거리에서」 전문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사람을 시인으로 바꾸어 읽어보자. 온몸의 플러그로 전류가 흐르기를 기다리는, 어떻게든 안에서 밖으로 나와야 하는, 세계와의 불화를 자신의 에너지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시인이다. 이원의 말처럼‘시적이라는 말을 배반하는 방식을 통해 시적이라는 말을 진화시키는’(『시와 세계』, 2007년 가을호)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2. 시와 식물
나는 정말 애기똥풀의 이름을 모르고 살았다. 나의 무지와 무관심 덕분에 눈앞의 모든 식물은 이름 없는 들꽃일 뿐이었다.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 나는 참회의 시를 썼다. 그 이후 식물의 이름을 알아가는 일은 내게 매우 흥미로운 일의 하나가 되었다. 이름을 아는 일은 그 존재의 입구로 들어서는 일이다. 이름이라는 형식은 존재의 기호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에튼보로는 『식물의 사생활』 서문에서 식물은 볼 수 있으며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정확하게 시간을 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과학의 발견이지만 시적 통찰이기도 하다. 식물은 단순히 동물에게 영양소와 목재와 그늘을 공급해주는 객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식물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의 중요한 구성원이다.
한국에서 식물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기 시작한 사람은 나카이 다케시노라는 일본인이었다. 그는 1913년 조선총독부 촉탁 식물학자로 들어와 4000종이 넘는 조선 식물을 근대적 분류법으로 등록했다. 특히 미선나무, 금강초롱 등 440여 종의 조선 특산식물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학계에 보고했다. 그의 식물채집과 통역을 도운 정태현, 생약학 전공자로 출발한 도봉섭이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의 식물분류학자라고 할 수 있다. 도봉섭은 한국전쟁 때 월북해 북한 식물학의 기틀을 잡았다. 1937년 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의 이름으로 발간한 『조선식물향명집』은 우리 학자들이 식물명을 집대성한 최초의 단행본이다. 이 책은 식물에 ‘조선명’을 부여하는 확실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수십 년간 전국 각지의 현지조사를 통해 식물명을 수집했고 실제로 조선인이 사용하는 이름을 우선으로 했다.
지금 덕수궁미술관에서는 ‘절필시대’라는 주제로 근현대화가 여섯 사람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시는 9월 15일까지 이어진다. 이 중에 도봉섭의 부인 정찬영의 식물세밀화는 이 분야의 원조라고 할 만하다. 그는 남편을 도와 식물세밀화를 그렸지만 부부가 함께 준비했던 식물도감은 남편이 행방을 감추자 출간되지 못했다. 정찬영은 1930년대에 모윤숙 최정희 노천명 등과 교유한 흔적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인 백석이 이 여성문인들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당시 백석은 조선일보에서 잡지 『여성』과 『조광』의 편집을 담당했는데 그가 국내 식물학 분야의 성과를 눈여겨보았으리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백석은 1935년부터 1962년 북한에서 마지막 시를 발표할 때까지 모두 115편의 시를 남겼다. 여기에서 식물 이미지로 분류할 수 있는 시어가 350여 개 등장하며 국가표준식물목록에 수록된 식물명이 105개에 이른다. 백석의 시에는 쇠조지(쇠서나물), 가지취(빗살서덜취), 이스라치(이스라지), 스무나무(시무나무), 들매나무(들메나무), 바구지꽃(미나리아재비)과 같은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식물명이 자주 출몰한다. 한국인들은 식물도감이 아니라 백석의 시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을 통해 ‘갈매나무’를 처음 만난다. 그는 갈매나무의 생태적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백석은 식민지의 현실을 받아들이거나 거기에 동조하는 대신에 그 현실을 응시하면서 현재를 견디는 상징으로서의 갈매나무를 설정했다. 그 갈매나무는 일제에 전면적인 저항을 하지 않으면서 친일의 길에 들어서지도 않았던 백석의 생애와 유사하다.
1935년 간행된 정지용의 첫 시집 『정지용 시집』에는 모두 89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48종의 식물명이 등장한다. 정지용은 자극적이면서 도발적인 감각을 구사하면서 외래어를 시에 끌어들이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백석과 달리 그는 장미, 바나나, 다알리아, 종려나무와 같은 외래식물에 뚜렷한 관심을 보인다. 정지용은 동백을 ‘춘나무’라고 쓰거나 ‘홍춘(紅椿)’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동백나무의 일본식 표기인 ‘쓰바키(椿)’를 사용한 것이다. 평안도 출신 백석이 통영을 가서 ‘동백’을 발견하고 그 표기를 그대로 쓴 것과는 뚜렷이 대조된다. 백석이 제대로 된 식물도감 하나 없던 시절에 매우 구체적인 식물명을 시에 끌어들였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이라고 할 수 있다.
3. 백석 시집 <사슴>을 도쿄에서 만난 날
백석은 윤동주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시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동주는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를 읽고 매료되어 ‘별 헤는 밤’을 썼다. 이 두 편을 비교해 읽어보면 백석에 대한 윤동주의 문학적인 흠모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된다. 이십대 초반부터 나도 백석의 ‘찐팬’이었다. 그래서 백석을 흉내 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너스레를 떨었고, 그리고 <백석평전>을 썼다.
<백석평전>의 일본어판이 출간되어 마련한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 지난달에 도쿄를 다녀왔다. 도쿄에 간 김에 번역자 이가라시 마키 씨의 안내로 백석 시인이 유학했던 아오야마학원을 방문했다. 백석은 1930년부터 4년간 이 대학의 영어사범과를 다녔다. 우리 일행은 백석의 학적부와 신상조사서 같은 재학 시절 서류를 열람하기 위해 작은 세미나실에 대기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백석과 관련된 복사물과 자료집들이 열댓 가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거기에 놓여 있던 백석 시집 <사슴>를 나는 처음에 영인본으로 생각하고 무심코 뒤적거렸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기면서 내 손끝은 떨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1936년 1월 20일 경성의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출간된 <사슴> 한 권이 바다 건너 일본 열도로 건너가 있었던 것이다. <사슴>은 우리 한지를 여러 겹 붙여 도톰하게 표지를 만들었고 내지와 본지는 한지를 접어 이른바 자루매기 방식으로 고급 제본을 했다.
2014년 한 경매에 나온 이 시집 한 권은 7000만원에 낙찰된 적이 있다. 백석은 이 시집을 조선일보 기자면서 문학평론가였던 친구 이원조에게 자필 사인을 해서 주었다. 이육사의 친동생인 이원조는 1947년 말에 월북했다가 한국전쟁 후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사람이다. 시집의 주인이 월북한 뒤에 어느 고물상이나 고서점을 떠돌다가 가까스로 귀한 몸이 된 시집.
현재 국내에는 몇 군데 도서관과 문학관, 그리고 개인 소장자가 <사슴>을 가지고 있는데 10권이 채 되지 않는다. 대출은 불가능하며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다. 나는 운 좋게 두 군데 문학관에 간청해서 <사슴>을 손으로 만져보고 책 냄새를 맡으면서 촬영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 시집들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때가 묻고 빛이 바랜 상태였다. 그런데 아오먀마 학원 소장본은 마치 금방 인쇄소에서 나온 것처럼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날 아오야마 학원 관계자에게 이 시집이 어떻게 여기로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금방 답을 알려주었다. 1936년 2월 22일 기증자 백석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었던 것. 백석은 시집이 출간되자마자 자신의 모교로 우편 발송을 했을 것이고, 한 달 가까이 걸려 도쿄에 도착한 <사슴>은 87년 만에 우리에게 발견된 것이다. 이 시집이 한국에서 얼마나 희귀한 책인지 대학 측에 설명을 해주었다. 한국에서는 1억원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울 거라 했더니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987년 당시 영남대 교수였던 이동순 시인이 <백석시전집>을 낸 이후 우리나라 독자들은 백석의 시에 열광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가장 많은 시가 실린 시인, 석박사 학위논문으로 가장 많이 다룬 시인이 백석이다. 나는 자주 농담처럼 말한다. 백석의 시를 안 읽어보셨다고요? 그의 시를 한 편이라도 읽은 뒤에 다시 만납시다.
4. 의미의 바깥
교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문학교육이 문학을 망치는 주범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교과서에 실린 문학 작품은 대부분 교실에서 실험실의 청개구리처럼 해부된다. 한 편의 시는 먼저 장르적 형태에 따라 분류되고, 이어서 시에 사용된 주요 제재와 주제를 파악하는 일이 이루어진다. 시적 표현의 특징은 서너 개의 문장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다. 교사는 전체 작품의 구성을 분석해 몇 개의 단락으로 나누고 그 단락의 성격과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한다. 낱낱의 시어들이 함유한 의미와 비유의 기법도 탐구한다. 짧은 한 편의 시를 앞에 놓고 참으로 거창한 일들이 벌어진다. 시를 대체 왜 그렇게 가르치냐고 물으면 금세 시라는 텍스트가 시험문제의 지문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시인들은 의미를 앞세우고 시에 접근하지 않는다. 시어 하나하나마다 의미의 낚싯줄을 꿰어 놓지 않는다는 말이다. 김소월이 「진달래꽃」의 마지막 연을 쓰면서 과연 ‘인고의 태도로 이별의 정한 극복’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을까? 이육사가 “가난한 노래의 씨”를 쓰면서 이 구절이 ‘조국 광복을 위한 자기희생적 의지’라는 의미로 읽히기를 원했을까? 이 시인들이 교실 안의 문학 수업을 참관한다면 몸 둘 바를 모르고 난감한 표정을 지을 것 같다. 언젠가 내가 쓴 시 「너에게 묻는다」를 가르치는 유튜브를 본 적이 있다. 끝까지 볼 수가 없었다. 마치 한 편의 잘 만든 개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느낌이었다.
학교에서 이런 방식의 문학교육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낯선 시를 들이밀면 대체로 당황해서 쩔쩔매게 된다. 시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는 강박이 그를 꽁꽁 묶기 때문이다. 혹여라도 의미를 잘못 파악했다가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의미는 언어에 규범화된 질서를 부여한다. 하나의 시어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규정되는 순간 독자는 시어가 품고 있는 의미의 바깥을 보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의미는 하나의 감옥이다. 의미는 언어를 강제한다. 의미는 독자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의미의 틀 안에 갇힌 독자는 스스로의 ‘느낌’을 포기한다. 대상에 대한 그 어떤 느낌도 없이 그 대상을 이해할 수는 없지 않나?
나는 남의 시를 읽을 때 시어의 의미를 먼저 생각하지 않으며 시의 주제가 무엇인지 따지지 않는다. 화자의 삶에 대한 태도를 파악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나는 의미 이전에 언어를 먼저 만나려고 한다. 언어의 모양과 빛깔, 언어가 만들어내는 소리와 냄새, 언어가 사전에서 뛰쳐나와 시어로 사용될 때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먼저 살핀다. 언어와 언어가 만나서 한 편의 시에서 어떤 불꽃과 향기를 만드는지 살펴본다. 그러다 보면 언어 앞에서 무릎을 꿇을 때도 있고 언어 때문에 급기야 무장 해제되기도 한다. 의미 없이도 우리는 얼마든지 시를 즐길 수 있다.
서투른 창작자일수록 자신의 시에 의미를 욱여넣으려고 한다. 그들은 펜을 잡자마자 거대하고 관념적인 기획과 의도로 시를 끌고 가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들의 언어는 행색이 볼품없이 초라하고 몸집이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 시인의 의도가 의미를 생산하는 게 아니라 시인이 데리고 온 언어가 의미를 만든다. 시인이 어떤 빛나는 의미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수록 시는 실패의 길을 걷게 된다.
매 순간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살 수는 없다. 그러면 인생이 얼마나 팍팍해지겠나. 가벼운 산책에 의미를 덮어씌우면 아마 한 걸음도 떼기 싫어질지 모른다. 짧은 농담에 무거운 의미를 갖다 붙여 이해하면 둘의 관계에 회복하지 못할 금이 갈지도 모른다. 의미 없는 일이 삶에 예상하지 못한 활력을 부여하는 일이 적지 않다. 시를 쓰는 일은 그래서 의미 없는 일에 집착하는 일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의미의 바깥을 독자에게 안내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언어를 의미의 울타리 안에 묶어두려고 하면 안 된다. 의미의 주인은 시인이 아니라 독자다. 물론 더 현명한 독자는 의미의 울타리 안쪽만을 주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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