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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쟁의 전설적 영웅 김원봉 장군 서훈과 예우는 민족의 명령

김환태 칼럼 | 기사입력 2019/06/06 [22:19]

독립투쟁의 전설적 영웅 김원봉 장군 서훈과 예우는 민족의 명령

김환태 칼럼 | 입력 : 2019/06/06 [22:19]


▲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임정요인들


항일독립운동과 무장독립투쟁


일제 식민지하에서 독립운동은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의병중심의 무장독립 투쟁이 1908년 전후를 하여 여단급 부대를 동원,호남지역에 집중된 그물치기 남선대토벌로 막을 내리고 3.1만세운동,6.10만세운동,광주학생의거 등 비무장,평화적 독립운동 또한 일제의 식민통치가 강화되면서 지속적 조직적,자생투쟁으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사실상 멈추어졌다.이처럼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일제통치가 강화되면서 휴지기에 들어갔다.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또한 초창기에는 활발히 전개되었다. 1910년 안중근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일본 제국주의 총리대신 이토오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저격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데 이어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으로 조국독립투쟁 의지를 만천하에 과시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한 일본은 사단급 전력을 투입하여 만주 일대에 걸쳐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로인해 독립군은 러시아 연해주,중국 전역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그동안 독립군의 인적,물적 보충 및 지원역할을 수행했던 동포사회도 일본군의 학살과 파괴로 제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하였다.


이로써 군사적 조직체계를 갖춘 정규전 형태의 대규모 무장독립투쟁은 가공할 현대적 전력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위력앞에 가로 막혀 버렸다. 그러나 구국의 항일무장독립투쟁 의지는 여전하였다.


▲ 문 대통령이 6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4회 현충일 추모식 추념사에서 약산 김원봉을 “국군 창설의 뿌리”로 지목하였다.


무장독립투쟁의 전설적 영웅 김원봉 장군


무장항일 독립전사들은 소규모 무장 항일조직을 결성하여 일본군과 일본제국을 대상으로 비정규전 형태의 게릴라식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중심에 약산 김원봉 장군이 있다.문재인 대통령은 6일 제 64회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며 김원봉 장군의 독립투쟁 공로를 높이 평가하였다.


문 대통령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 힘으로 1943년, 영국군과 함께 인도-버마 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고, 1945년에는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며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되었다"며 김 장군에 대한 국가 차원의 서훈 등 예우 의지를 분명히 했다.


문 대통령이 강조한데서 보듯 사실상 김원봉 장군을 빼면 독립운동사가 초라해질 정도로 김원봉 장군의 활약은 실로 눈부시다. 일본 제국주의가 독립운동의 최고봉으로 뽑는 김구선생보다 현상금을 더 많이 내걸 정도로 김 장군은 일본에겐 염라대왕같은 두려움의 존재였고 우리 겨례에겐 독립운동의 상징이요 영웅이었다.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김 장군은 밀양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시절 일왕 생일인 천장절에 일장기를 변기에 쑤셔 박아버리고 학교를 그만둘만큼 어릴때부터 항일의지가 남달랐다. 그 후 김 장군은 열여덟살 때 독립투쟁의 큰 뜻을 품고 중국으로 건너 갔다.


중국에 건너간지 3년 되던 21세 되던해 일본의 총칼앞에 만세 운동이 무참하게 진압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김 장군은 비분강개하여 곧바로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겠다는 일념하에 항일 비밀결사조직인 의열단을 만들었다.


이후 의열단 소속의 김익상,김상옥,박열,나석주 의사등은 혈혈단신 권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종로,부산,밀양 경찰서와 조선 총독부를 공격,폭파한데 이어 적진인 일본까지 잠입, 제국주의의 아성인 도쿄 황궁 나주바시코를 폭파하는 등 6년동안 23차례에 걸친 무장투쟁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 약산 김원봉 장군


김 장군은 장차 일본군에 맞선 군사적 무장독립전쟁을 대비하여 1926년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적 지식과 지휘통솔력 등 군간부로서의 자질을 배양한 후 조선혁명간부학교(1932년)를 설립하고 민족혁명당(1935년)을 결성하였다.


이어 마침내 정규 군사 조직 형태의 조선의용대(1938년)를 창설했다. 김 장군은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이끌면서 대원들 앞에 설때면 늘"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다. 우리가 선구자가 되어 민중을 각성시켜야 한다"며 자주적인 항일 독립투쟁의지를 북돋웠다고 한다.


김 장군은 의용대 창설 후 3년째 되던 1941년 민족혁명당의 김구 주석이 이끌던 임시정부 참여를 선언하고 합류한후 다음해인 1942년에는 300명 규모의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시키고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광복군을 이끌었다.그후 2년 뒤인 1944년에 국방장관격인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취임하여 광복군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는 등 무장항일독립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김 장군의 서훈,예우 막는 친일반민족 수구집단의 색깔론 공격


이처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항일 무장독립투쟁에 온몸을 바친 독립운동의 전설적 영웅이지만 김 장군은 남과북 어느 쪽으로 부터도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그동안 구한말 의병,3.1운동,임시정부,의열단 및 무장독립투쟁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300여만명(순국자15만명 포함)가운데 공적이 확인되어 건국훈장,건국포장,대통령 표창 등 1만 5511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


이처럼 서훈을 받은 유공자가 상대적으로 적은것은 후손들이 공적 근거등을 제대로 보존,유지못한데도 이유가 있지만 이승만이 기용한 친일파들이 독립투사들의 독립운동,투쟁 관련자료를 계획적으로 파기하는 등 흔적을 말살한 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 된 친일매국노 4389명 가운데 친일경찰 노덕술,이정용 일본군 헌병 신상묵 등 224명이 무공훈장 등 상훈을 받았는데도 진정 애국투사인 김원봉 장군만 빠져있다. 이처럼 김 장군이 독립유공자로 서훈과 예우를 받지 못한 이유가 참으로 황당하고 치졸하다.


김 장군이 대한민국이 정통성으로 내세우는 자유민주체제에 반하는 공산주의자인데다 월북하여 북한 정권 고위직을 지내는 등 북한정권에 기여하였기 때문이란다. 노무현 정부들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의 길을 열면서 비록 한 등급 낮춰 서훈하긴 하였지만 2005년 권오설,조동오,김철수 선생등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다.그러나 이때에도 김원봉 장군은 포함되지 않았다.


김 장군이 1927년 중국 공산당이 주도한 광저우 봉기에 참여하고 2년 뒤 사회주의 운동가 안광천과 베이징에서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을 만들면서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설립하는 등 공산주의 운동에 발을 들여 놓기도 하였지만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우파인 장제스의 국민당과 협력관계를 맺으면서 좌파와 거리를 두었다.


김 장군이 좌우익 가리지 않고 관계를 맺은 것은 이념보다는 독립운동 때문이었다. 김 장군이 일관되게 견지한 사상은 제국주의를 타도하여 조국의 독립을 이루어 내 근대적 의미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민족혁명론'이었다.


이러한 '민족혁명론'은 김 장군이 창당한 '조선민족혁명당'이 표방한 민주주의 정치체제, 국민의 기본적 자유 포괄적 보장,사회주의 색채를 가미한 토지 및 기간산업 국유화 강령에 잘 드러나 있다. 당시 국제 공산주의가 내세운 노선이나 계급혁명론을 따르거나 프롤레타리아 정권을 지향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승만에 의해 정부 요직 등 각계각층에 등용되어 수구기득권 세력으로 자리잡은 친일매국반민주 세력과 이들의 후예 패거리들이 김 장군을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로 물고 늘어지는 것과 달리 김 장군은 뼛속까지 민족,민주주의자인 것이다.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독립 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이 정한 "1945년 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에 있는 자"로 정한 예우기준에 맞춰 김 장군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고 예우하는 게 천만번 지당만당한데도 공산주의자,월북,북한정권기여라는 색깔론으로 걸고 넘어지는 적반하장적 폭거다.


김원봉 장군이 월북했다는 건 생트집이다. 김장군은 자진 월북한게 아니다. 김구,김규식 선생등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남북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북에 남았던 것이다.


당시 김 장군이 부모형제 가족이 살고있는 남쪽 고향땅을 놔두고 북에 남은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김 장군은 광복 후 임정요원으로 고국에 돌아오자마 일제치하에서 악명을 떨쳤던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뺨을 맞고 고문을 당하는 등 수모를 겪자 사흘동안 울음을 그치지 않을 정도로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그 후 함께 좌우합작을 추진했던 동지인 여운형선생이 1947년 암살을 당하자 신변에 대한 불안이 현실로 다가왔고 이승만 주도의 남한 단독 정부수립에 반대입장을 견지한 상태에서 남쪽에서 더 이상 소신을 펼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차라리 북에서 자신의 지론인 '민족혁명론'에 입각, 하나의 민족 국가건설을 실천에 옮겨보겠다는 대의를 위해 북에 남은 것이 아닌가 한다.


김 장군이 북에서 국가검열상,내각 노동상,최고인민회의 상임위부위원장 등 고위직을 지내기는 하였지만 6.25전쟁 수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독립투쟁의 영웅이면서도 남쪽에서는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공산주의 빨갱이로 몰려 수모를 겪었고 북에서는 끝내 중화민국 장제스 국민당의 비밀정보기구인 '삼민주의역행사'책임자와 접촉했던 과거사를 문제삼아 자유진영과 내통한 국제간첩혐의를 받고 숙청당했다.


김 장군의 비운은 자신만으로 끝난게 아니었다. 북쪽에서 고위직을 지낸 것이 빌미가 되어 아버지는 유폐당해 굶어 죽었고 네명의 형제와 사촌 다섯명은 학살당했다. 좌우를 뛰어넘는 하나의 조국을 위한 '민족혁명론'에 입각한 독립투쟁에 대한 대가는 이처럼 참혹했다.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가난하다고 하지만 김 장군의 경우는 아예 멸문지화를 당할 정도로 혹독했던 것이다.


김원봉 장군 서훈과 예우는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민족의 명령


친일반민주 수구 기득권 세력들에겐 이것으로도 부족한 모양이다. 문재인 정부가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김원봉 장군에 대한 서훈을 추진하자 친일반민주 적폐소굴인 한국당,수구언론들이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약방의 감초처럼 들고나와 울궈먹고 족쇄를 채웠던 빨갱이 색깔론을 무기로 김원봉 서훈반대 난동굿판을 벌였다.


이들 수구 적폐세력이 걸고 넘어지는 북쪽 김일성 정권이나 남쪽 이승만 정권은 우리민족의 뜻에 반하는 미국과 소련의 패권적 국익의 산물이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뜻에 의한 자주적인 통일국가가 아닌 분단체제로 만든 원죄는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친일 수구세력 자신들의 친일 매국노 부모형제 등 친일 조상에게 있다.


사이비 보수 수구기득권세력의 반민족 조상인 친일 매국노들이 왜놈들에게 나라를 팔아 먹지 않았다면 나라가 두동강 나지도 않았고 이승만,김일성 정권은 아예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이 원죄의 책임소재가 이처럼 명명백백한데도 김원봉 장군의 김일성 정권 부역 운운하며 전설적 독립 영웅을 구천을 떠돌게 한다면 이야말로 천인공노할 패악적 만행이 아닐 수 없다.


문재인 정부에 강력 촉구한다. 더 이상 김원봉 장군에 대한 서훈과 예우문제에 대해 좌고우면하거나 반민족 친일반민주 수구기득권 적폐집단의 눈치를 보지말라. 독립영웅 김원봉 장군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과 예우는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민족의 명령이다.


문재인 정부가 민족의 명령을 받들지 아니한다면 역사적 죄인으로 청사에 오명을 남길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하루빨리 민족의 지상명령을 받들어 김원봉 장군 서훈 결단으로 민족정기를 바로잡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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