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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민주항쟁과 간첩으로 몰리고 보직해임 파란곡절 군생활...늘 부끄럽지만 아직 의지는 살아있다

김환태 칼럼 | 기사입력 2020/05/18 [06:55]

5.18광주민주항쟁과 간첩으로 몰리고 보직해임 파란곡절 군생활...늘 부끄럽지만 아직 의지는 살아있다

김환태 칼럼 | 입력 : 2020/05/18 [06:55]

 

 

육군 중위 시절 겪은 5.18광주민주항쟁

 

해마다 광주 민주항쟁 기념일을 맞을때면 나로서는 감회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5.18광주민주항쟁은 나의 파란곡절로 점철됐던 군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나는 육군 중위 시절 광주민주항쟁을 겪었다.

 

광주민주항쟁은 1979년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주도한 정치군인 집단 신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사실상 정권을 강탈하면서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물거품 된게 근본 배경이 되었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최대의 걸림돌인 김대중,김영삼,김종필 3김씨를 내란,부정부패 혐의를 씌워 전격 구속,연금하는 것으로 민주화의 봄을 짓밟았다.

 

총칼을 앞세운 신군부의 위세에 기가 꺾였던 다른지역과 달리 광주는 항쟁의 길을 택했다. 광주가 신군부와 결사항전을 택하게 된 것은 이땅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 소외와 차별로 뼛속까지 응어리진 호남의 한을 풀어줄 메시아로 여겼던 김대중 선생이 정치생명이 끝장날 수 있는 내란수괴혐의로 구속된데 대한 극도의 분노와 절망감때문이었다.

 

전두환 공수부대 위세작전에 결사항전 5.18광주민주항쟁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 민주화 시위도 부마사태때처럼 공수부대를 투입 공포심 유발 군용트럭 위세작전을 펼치면 조기에 수습될 것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무친 호남의 한,몽골,임진왜란,동학항쟁,구한말 의병투쟁,광주학생의거 등 호남이 역사적으로 보여준 결사항전의 의지를 과소평가한 오판이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공수부대 위세작전으로도 시위진압이 안될 경우 시위대 몇명 사살하면 총에 맞아 죽기 싫어 시위를 더 이상 벌이지 못할 것이라고 총기 사용을 최후 진압 수단으로 강구하지 않았나 한다.

 

월남전에 연대장으로 참전하여 월맹군,베트콩과의 전투과정에서 파리목숨 죽이듯 사람 죽이는 걸 아무럲지 않게 여겼던 전두환으로서 권력을 위해 광주시민 몇 명 죽이는 것쯤이야 식은죽 먹기보다 쉬운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 신군부의 그러한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오히려 시위대를 더욱 격분시켜 총기로 무장한 시민군으로 전환하여 결사항전에 나서게 만들었다. 급기야 전두환 신군부는 20기계화 사단,향토사단,전교사,공수여단, 헬기부대 등 대규모 군사력을 진압군으로 투입하기에 이르렀다.

 

1980년 5월21일 오전 잔인무도한 광주 학살극을 듣고...

 

시민군은 병력과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신군부 진압군과 7일동안 전쟁을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수백명이 학살을 당하는 등 수천명의 희생을 치른 끝에 강제 유혈 진압 당하고 말았다. 당시 중위였던 나는 부산 해운대에 위치한 방공포병대대 작전보좌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모든 교육훈련 정보작전 업무를 총괄하는 작전과 보좌관이었지만 광주민중항쟁 초기 부마민주항쟁때와 같이 상급 부대로부터 지시받은게 없었던 탓에 광주에 공수부대가 투입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시 광주민주항쟁 소식을 접하게 된건 우연이었다.대대 예하부대가 충청남도 서해안에 위치한 대천 해수욕장 인근 사격장에 미사일 사격훈련을 하게 되어 있어 작전과장을 대리하여 사격훈련과정을 참관,감독하라는 지시를 받고 대천으로 가는 도중에 광주에서의 공수부대에 의한 시민 학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나는 부산에서 충남 대천으로 가기 위해 부산-진주-함양-남원-전주-군산을 거쳐 장항에서 장항선 열차를 이용하는 코스를 택했다. 1980년 5월 21일 아침 부산에서 전주행 직행버스를 타고 함양을 지날때쯤 함양에서 탑승한 승객들이 "서울에서 난리가 난 것 같다. 인민군이 쳐내려온 것 같다" 며 웅성댔다.나는 속으로 시골양반들이 뭘 잘못듣고 헛소리를 하시는 것 같다고 여겼다.

 

그런데 경남과 전북 도 경계선상에 위치한 팔량치를 넘어 남원 동부지역 인월에서 차에 오른 승객들은 한술 더 떳다. "광주에서 뭔일이 난 것 같아요. 광주 텔레비 방송 모두가 먹통이 됐어요. 안 나와요. 광주에서 큰 난리가 난 모양이요" 모두들 전쟁이 터진 것 같다는 둥 한마디씩 하며 좌불안석이였다.남원은 전북에 속했지만 지리적으로 광주가 가까웠던 관계로 전주지역 방송이 아닌 광주지역 방송을 시청권으로 삼고 있었다.

 

버스가 남원 공용 터미널에 도착하여 대기하는 동안 밖으로 나와보니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야단법석이었다. 광주에서 금방 도착했다는 직행버스 기사라는 분이 모여든 사람들에게 "광주에서 공수부대가 사람들을 다 죽이고 있어요. 처녀 젖가슴을 대검으로 도려내고 임신부 배를 가르고 총질을 가해 사람들을 쏴 죽이고 있어요" 목에 핏대를 올려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1200만 관객을 끌어 모았던 광주 5.18민주항쟁을 소재로한 영화'택시운전사'에서 식당 손님들이 나누던 대화와 똑 같은 말을 그 때 들은 것이다. 나는 직행버스 기사분의 말이 너무 황당하여 운전기사분에게 "아저씨, 군인들이 사람을 죽이고 있다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광주에 무슨 공수부대가 있다는 말입니까?" 라며 큰 소리로 항의했다.

 

그러자 버스 기사분은 눈을 부라리며 "당신 장교야? 모르면 가만히 있어. 나 지금 광주에서 직행버스 몰고 방금 도착했어. 도착하자마자 광주 집으로 전화해서 아이들 절대 밖에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어. 내가 지금 광주에서 공수부대원 놈들이 사람을 쏴 죽이는 것을 직접 보고,듣고하는 말인데 무슨 말이라니,성질 돋구지마!" 냅다 고함을 쳤다. 나는 공수부대원이 아가씨와 임신부를 대검으로 난도질하고 총으로 무차별 사살한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부마민주항쟁 진압,광주민주항쟁 학살 주범 전두환

 

그러나 그날 군산을 거쳐 장항선 열차를 타고 오후 7시쯤 대천에 내려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에 들렀다가 광주민주항쟁 소식을 TV뉴스를 통해 접하면서 남원에서 들은 광주 항쟁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식당 텔레비전 7시 뉴스에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이희성 육참총장이 출연하여 광주에서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켜 군을 투입하여 진압작전을 펼치고 있다고 발표한 것이다.

 

나는 이희성 계엄사령관 발표를 시청하면서 분노를 금치 못했다.낮에 남원에서 버스 기사분이 처녀 젖가슴을 도려내고 임신부의 배를 대검으로 갈랐다는 절규가 사실일 것이라는 생각에 치를 떨었다.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할 군이 국민을 살륙하는 극악무도한 만행을 자행했다는 데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흘러 나왔다.

 

나는 부산 남포동,광복동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부마민주항쟁 진압과 광주민주항쟁 학살극이 정치군인 박정희 짝퉁 전두환의 권력욕에서 비롯된 일탈 망동으로 확신하고 생도 시절 배웠던 국토보위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게 군의 본분,사명에 반하는 국민을 죽이는 학살극을 자행한 정치군인 전두환 일파를 군과 국가안보를 망치는 반역자로 규정했다.

 

5.18 종료후 사령부 유언비어 유입차단, 고도의 전투력 유지 세미나에서 광주학살,계엄사 허위 발표 강력 비판

 

광주민주항쟁이 학살극으로 끝난후 신군부는 육해공 전군 사령부 단위로 군 내부 유언비어 유입차단,고도의 전투력 유지 방안 세미나를 개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각 사령부 예하 대대급 이상 부대 정훈장교나 군종장교가 방안을 연구하여 발표하게 되어 있었다.

 

당시 우리 대대는 정훈장교가 전임자가 전출간후 후임자가 배치되지 않아 공석 상태였기 때문에 대대장은 작전보좌관인 나에게 대대를 대표하여 발표자로 사령부 세미나에 참석토록 지시하였다.

 

대대장의 지시를 받은 나는 국가를 보위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군의 사명과 책무에 투철한 청년 장교였기 때문에 진압군의 광주 학살극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로 작심하였다.

 

이와같은 나의 결심은 군의 사명에 입각한 군인정신외에도 당시 광주지역을 향한 험악한 일부 군 내부 분위기,일본과 가까워 일본 TV방송의 시청권에 있던 부산의 특성상 신군부의 통제로 광주 현장 진실을 보도하지 못한 우리 언론,방송과 달리 광주에 투입된 일본 특파원들이 보낸 실시간 광주 항쟁보도 일본TV방송을 시청하면서 신군부 계엄사가 진실을 숨기고 거짓발표하고 있음을 부대원 전원이 알고 있었던 이유도 컷다.

 

당시 부대원들은 내무반에 비치된 텔레비전을 통해 일본방송 뉴스 시청을 통해 광주민주항쟁 진실을 대략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방부,육분,공보처등에서 시도때도 없이 장병 정신교육 자료로 내려 보낸 '광주 폭동','김대중 사생아 출신 좌익분자' 등 각종 팜플릿 내용을 비록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믿지 않고 있었다.당연히 정신교육 효과는 거의 없었다.

 

여기에 내가 가슴이 아팠던 것은 계엄사 발표 이후 광주민주항쟁기간 동안 일부 군 장교와 병사들의 광주와 호남에 대한 혐오,매도 막말과 전라도 출신 장병들을 따돌리거나 심한 경우 범죄자 취급하는 행태였다.

 

우리 부대에서도 내무반에서 물품을 분실하자 내무반원들이 가장 먼저 전라도 출신 병사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사실을 고백하라고 몰아 세운 일이 있었다.해당 병사의 하소연을 직접 듣고 그러한 사실을 알았다.

 

장교도 마찬가지였다.장교들 가운데 늘 목과 말소리에 힘을 주는 보스형 대위가 있었다.점심 식사후 대대 참모들 몇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가 두 손을 허리에 갖다 댄 자세로 고함을 질렀다"광주 새끼들은 모조리 총으로 쏴 죽여 버려야 돼!!"

 

전라도 출신 장교와 병사들이 주변에 있었지만 광주 폭도라는 주홍글씨가 박혀 있을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모두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채 아무말도 못했다.

 

그러나 나는 가만히 있을수가 없었다."일본 TV방송 못 보셨습니까.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라고 들려 준 총으로 시민을 쏘아 죽인 군이 잘못한거지요.계엄사도 허위 발표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저는 지금 전쟁이 난다면 적을 향해 사용해야할 총으로 국민을 죽인 놈들을 청소하고 전쟁터에 나가겠습니다"하였더니 대위는 울그락불그락 핏대를 올리면서"김중위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소리를 질렀다.나는 즉시"할말을 했습니다"내뱉고 부대 뒤쪽으로 가서 화를 삭였다.

 

나는 농고를 다니며 지게지고 농사를 짓던 두메산골 촌놈으로 장교가 된 것만으로도 과분한 출세를 했다는 생각에 언제 군복을 벗어도 아쉬울게 없다는 자세로 군의 사명과 책무를 최우선으로 근무를 해 왔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이러한 소신에 바탕해 광주에서 시민을 향해 발포한 것은 군의 잘못,계엄사 허위발표,부산의 일본 방송 시청 특성상 정신교육 무의미 하다는 위주로 세미나 발표자료를 전지 괘도로 만들어 참석 준비를 하였다.

사령부 세미나 발표 며칠 전 갑자기 여단사령부에서 여단 참모장이 발표자료를 점검하겠다며 여단으로 들어 오라는 지시를 하였다.나는 준비한 괘도를 지참하고 여단으로 들어가 여단 참모들이 배석한 가운데 참모장께 점검을 받았다.

 

대령 참모장은 내가 군의 발포에 의한 시민 살상 잘못, 계엄사 거짓 발표등을 힘주어 설명하자 점점 얼굴빛이 변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 뱉고는 심각한 표정으로"김중위,지금 누굴 죽이려고 작정한 것인가"하더니 괘도를 한장 한장 넘겨가면서 다시 확인하면서 문제 있다고 지적한 내용은 모두 삭제하고 장병 정신교육 강화 마지막 한장만 사령부 세미나에서 발표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지시에 따르겠다고 하였지만 사령부 세미나에는 준비한 괘도를 그대로 가지고 갔다.사령부 강당에는 대령급 참모를 비롯 사령부 전 장교와 사령부 보안부대장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각부대를 대표한 군종장교와 정훈장교들은 대위,소령급 장교들 이었고 중위는 나 혼자였다.계급이 가장 낮은 내가 마지막 발표하기로 순서가 정해졌다.앞서 발표한 타부대 정훈장교와 군종장교들의 발표내용은 정신교육 강화,서신점검 강화,외출외박 휴가전후 면담 및 교육훈련 철저 등 대동소이하였다.

 

발표 내용이 천편일률적으로 판에 박힌 내용이다보니 장교들은 하품을 하거나 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마지막으로 연단에 선 나는 내용이 내용인지라 마음과 달리 조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긴장을 풀기 위해 "이렇게 훌륭하신 선배장교님들 앞에서 발표의 기회를 갖게 되어 영광"이라면서 "세사람앞에 서기만해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촌놈이라 발표가 서툴러도 귀엽게 봐 달라"고 운을 떼자 여기 저기서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본론에 들어 가기 무섭게 계엄사가 폭동으로 허위발표를 하는게 문제라고 포문을 열었다.

 

첫마디 부터 심상치 않다고 여겼는지 모두 눈들을 말똥말똥 뜬 상태로 긴장된 표정을 짓기 시작하였다.한 걸음 더 나아가 준비해간 괘도를 넘겨가며 군복을 벗을 각오로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라고 들려준 총으로 시민을 학살한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면서 거듭 부산에 있는 우리 부대는 부대원들이 일본 텔레비젼 뉴스 시청을 통해 일본 특파원들이

광주 현지에서 시민군과 인터뷰 한 내용,태극기를 덮은 수 많은 시민군 사망자 관이 비치된 곳에서 울고 있는 유가족 동영상을 포함 생생하게 취재하여 보도한 내용과 계엄사 발표가 다르다는걸 알고 있기 때문에 국방부,육본에서 내려보낸 김대중 사생아,광주 폭동 일색 위주 정신교육용 팜플릿으로 교육할수가 없다"고 선언하자 강당은 긴장으로 휩싸이는 모습이 역력했다.

 

당시는 서슬푸른 신군부 체제의 계엄하였기에 정권 비판적 발언을 한 민간인의 경우 가차없이 잡아 들이는 무서운 세상이었다.민간인도 아닌 절대복종해야할 장교가 최고 권력이자 군의 수뇌부인 신군부 계엄사를 비판하고 광주학살을 문제 삼았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었으니 넋이 나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세미나가 끝난 후 사령부 장교 식당에서 칵테일 파티가 있었다.파티 도중에 인사참모 대령이 내 등뒤로 다가오더니 손으로 등을 다둑거리고 지나갔다.조금 있으니 사령부 군종장교가 나에게 다가왔다.사령부 군종장교는 목사님이었는데 계급은 중령이었다.

 

사령부 군종장교는 사령관도 계급으로 부르지 않고 "목사님"으로 부르면서 깎듯이 예우하는게 관례다.따라서 연륜이 있는 중령급 군종장교는 사령관에게도 할말을 한다.

 

그래서인지 사령부 군종장교 목사님은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주위에 사령부 보안부대장이 있는데도 개의치 않고 악수를 청하면서"김중위 용기가 정말 대단하다.어떻게 이런 발표 자료를 준비했는가"하며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그 때 나는 신군부 위세에 출세주의 아부형 장교들외에 대다수 장교들은 침묵을 지켰을 뿐이지 속으로는 전두환 일당의 광주 학살에 비판적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세미나 발표로 인해 나의 신상을 걱정해 주는 분들도 있었으나 장교 동향 파악 부실 책임 문제가 불거질까 염려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사령부 보안부대가 문제를 삼지 않아 조용히 넘어 갔다.

 

간첩혐의로 보안사에 체포되어 곤욕 치러

 

문제는 내가 대위 진급후에 터졌다. 대위 진급전 나는 6개월 가량 작전과장 임무를 대행하고 있었다.작전과장은 소령 직위인데 전임 작전과장이 타부대로 전출된후 후임 작전과장이 보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작전과장 대리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밤잠을 설치면서 과장 업무를 처리했다.그런데 한치의 오차 없이 과장 임무를 대행한게 화근이었다.대대장 주재 아침조회 시간에 대위급 타 부서 과장들이 나 때문에 심한 꾸지람을 듣는 일이 심심찮게 발생한 것이다.

 

다른 부서 업무는 작전과 업무에 비하면 부담이 매우 적은데도 대대장 지시 이행이 늦어지는데다 기본업무 처리가 매끈하지 못한 경우가 자주 발생하자 대대장이 "작전과 일하는거 안보이나? 중위가 소령 과장이 해야할 힘든 작전과 업무를 완벽하게 처리하는데 너희들은 대위 계급을 어떻게 달았어.일하는게 뭐 이따위야.형편없는 X들" 등 대대장실이 떠나갈 정도로 화를 내거나 심한 경우 결재판을 내 던지기까지 하였다.

 

광주민주항쟁 문제로 나와 갈등을 빚었던 대위도 단골 표적이었다.이처럼 회의 분위기가 엉망인 날이면 회의를 마치고 나온 대위급 참모들이 나를 향해 화풀이를 하였다."김중위 잘 났다.어디 한번 잘해봐.조심하는게 좋을걸" 식의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자신들의 미숙한 업무처리에대한 질책을 달게 받아 들이지 못하고 엉뚱하게 화풀이를 하는 모습이 정말 안타까웠다.다행이 대위 진급 한달 전 후임 작전과장이 부임하고 대위 진급과 동시 작전통제과장을 3개월 가량 수행하다 대위 진급자면 모두 받아야하는 고등군사반 교육을 받기위해 대구 주변에 위치한 병과학교로 전출가면서 선배 장교들과의 불편한 관계는 끝이 났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대구 범어동에 하숙집을 정해 등하교를 한지 2개월이 지날 무렵이었다.학교에 등교하여 첫 시간 수업이 시작된지 10분정도 지난 오전 8시 10분쯤 갑자기 사복 차림의 보안사 수사관들이 강의실로 들이 닥치더니 다짜고짜 양쪽에서 내 두 팔을 껴안고"갑시다"하더니 밖으로 끌고 나갔다.

 

강의실 밖에는 보안사용 검은 지프가 멈춰 서 있었다.지프에 태워진 나는 곧장 대구 경북지역을 관할하는 보안사 직속 00공사로 실려갔다.00공사는 대구 시내에 위치하고 있었다.00공사에 도착하자마자 수사관들은 사무실이 아닌 부대내 안가로 여겨지는 독립 건물 내 독방으로 데리고 갔다. 독방 출입문 앞 양 옆으로 소총에 실탄이 장착된 탄창을 삽입한 소총을 경계총 자세로 무장한 2명의 경계병이 배치되어 있었다.

 

병과학교에서는 보안사 00공사 대공과에서 등교하자마자 체포하여 데리고 가자 난리가 났던 모양이었다.보안사에서는 학교 지휘부에만 간첩 혐의로 조사할게 있어 체포했다는 언질만 했던 것 같다.현직 학생 장교가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가자 학교측은 전전긍긍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체 함구령을 내리고 학교 핵심 간부 5명을 내 하숙집으로 보내 내가 조사를 마치고 돌아오는지 확인하여 보고토록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조사결과 만약 내가 간첩으로 판명되어 구속되면 학교 지휘부는 물론 내가 근무했던 부대 지휘라인의 문책이 불가피했던 만큼 걱정이 클 수 밖에 없었다.

 

00공사 독방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모두 사복 차림을 한 네명의 수사관이 들어 왔다.중령계급의 대공과장과 상사,준사관으로 추정되는 50대 초반의 수사관 3명이었다.대공과장은 나에 관련된 자료를 휴대하고 있었다.

 

대공과장은 자리에 앉더니 "김대위,장교이니까 신사적으로 조사에 임해달라"고 입을 열었다.나는"알았습니다"하고 대답했다.곧이어 나이든 수사관이 휴대품 모두를 꺼내 놓으라고 말했다.

 

나는 지갑과 가지고 있던 현금 100만원을 꺼내 놓았다.당시 100만원은 적금 만기가 되어 며칠 전 은행에서 찾은 돈으로 대위 월급의 4개월치에 해당되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현금 100만원이 나오자 대공과장과 수사관들은 서로 쳐다보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수사관 한명이 "과장님 이 돈은 공작금이 맞는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간첩으로 판단한 것이다.충분히 공작금으로 오해할 수도 있었다.다른 수사관이 "배후를 대라"고 조용히 다그쳤다.나는 적금 만기가 되어 찾은 돈이라고 해명했지만 의구심을 거두지 않은 눈치였다.

 

이어 수사관들은 돌아가며 월북자와 연락한 사실이 있는지 노동당 입당 계획을 갖고 있는지,월북을 시도 했는지 월북할때 가져가기위해 군사비밀을 수집하였는지,동반 월북자 유무 등을 캐물었다.특히 월북한 동기생과 어떤 관계냐고 집요하게 진술을 요구하였다.

 

생도 시절 같은 훈육중대 소속으로 절친했던 동기생이 공병소위로 임관후 전방에서 근무하다 북으로 월북했었다.월북한 동기생이 평양 대동강에서 아리따운 평양 아가씨와 보트를 타고 유람하던 사진이 담긴 삐라가 대량 살포되어 월북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병과도 다르고 어느 부대에 근무한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대답했지만 의심을 살 여지는 충분했다.

 

군사비밀을 수집한 사실도 없고 북한과 어떤 연락관계도 없다고 대답하니 노동당에 입당하겠다는 말을 한적이 있는것으로 알고 있다는 말까지 하였다.수사관들의 말을 들으니 빼도박도 못할 완벽한 간첩이 따로 없었다.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조사에 어이가 없었지만 뾰족한 수를 찾을 수 없었다.

 

세시간 가량 조사를 마친 대공과장은 수사관들과 함께 진술자료를 들고 방을 나갔다. 화장실에 볼 일을 볼때는 무장한 경계병 두명이 양쪽에서 팔을 끼고 화장실을 오가야 했다.수사관들이 자리를 비운지 얼마 안되어 점심식사가 배달되었다.외부 식당에서 특별 주문한 식사였는데 고급 음식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점심 시간이 지나 조금 있으려니 대공과장과 수사관들이 돌아 왔다.대공과장은 "점심 식사 잘 했느냐"고 물었다."고맙습니다"하고 대답하면서도 간첩 혐의를 벗어나기가 힘들겠다는 불안감이 스쳤다.

 

그런데 대공과장은 느닷없이 "김대위 살아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나는 말로만 듣던 고문까지 다시 강도 높은 조사가 시작되지 않을까 여기고 있었는데 대공과장이"살아나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자 한가닥 희망이 생겼다.

 

나는 곧장 "사실 제가 간첩의 누명을 쓰고 구속되어 징역을 살고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고향에 돌아가면 부모님께 큰 불효가 될 것 같고 그동안 군생활 동안 모신 직속상관분들께도 피해를 줄 것이니 과장님께서 도와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말로 도움을 요청했다.

 

나의 말이 끝나자 대공과장은"그래 살아 나가야지" 하더니 자신들이 세시간 정도 조사하면 간첩인지 아닌지 드러난다면서 조사결과 김대위는 간첩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됐다고 하였다.그러면서 대공과장은 내가 소위 임관후 소대장으로 배치된지 불과 6개월만에 사령관이 임석한 기지 경계태세 시범을 우수하게 치르고 소대장을 마치기도 전에 대대 작전보좌관으로 임명되는 등 작전계통에서 실력을 발휘한점 그리고 '보안심득사항'이 지갑에서 나온걸 볼 때 보안의식이 투철한점이 인정되고 은행 확인결과 현금 100만원은 적금 만기로 찾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하였다.

 

그러나 1차 조사결과를 놓고 지휘부에서 의논결과 미진한 부분이 있다고 결론이 나와 추가 조사로 보완하자며 다시 2시간가량 조사를 진행했다.2차 조사를 마친 대공과장과 수사관들은 지휘부와 조사결과를 최종 결론내기 위해 다시 방을 나갔다.1시간 가량 지난 후 돌아 온 대공과장은 더 조사가 필요하다며 3차 추가 조사를 진행한후 방을 나갔다가 저녁 7시쯤 돌아 오더니"김대위 살았다"면서 대공과장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대공과장과 수사관들과 함께 커피를 들면서 대공과장은 "김대위가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었다면 여기를 빠져 나갈 수가 없었는데 이제 다 끝났으니 돌아가면 교육 잘 받고 열심히 군생활하라"안심시켜 주었다.

 

나는 조사를 받는 동안 누가 나를 간첩으로 몰았을까 곰곰히 생각했었다.수사관들의 질문내용을 볼 때 군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관련된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광주민주항쟁 언쟁,업무 수행문제로 대대장으로부 문책 등으로 갈등을 빚었던 선임장교들에게서 비롯된 것 같다는 강한 합리적 의심이 들어 조사 기간 그 점을 제기하려다 괜히 근무했던 부대와 모셨던 상관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만 두었었다.

 

그러나 조사가 끝난 상태여서 조사에 이르게 된 과정을 확인해봐도 될 것 같아 대공과장에게 "어떻게 제가 간첩혐의를 받게 되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더니 대공과장은 "보안사령부에서 지시가 내려와 조사한것 이외는 말할 것이 없다"면서 더 이상 알려고 하지말라고 하였다.

 

그런데 내가 앉은 의자 바로 옆에 대공과장 집무 테이블이 있었는데 흘깃 테이블 위를 살펴보니 보안사령부에서 내려온 2급군사비밀 도장과 특급 도장이 찍힌 전문이 놓여 있었다.그 전문을 보니 나에 대한 혐의가 다섯가지로 적시되어 있었다. 다섯가지 혐의는 월북자와 연락 유지,월북을 기도,내부 조직망 구축,북 제공용 군사비밀 수집,노동당 입당 추진 다섯가지였다.차를 마시고 대공과장과 수사관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저녁 7시 30분쯤 하숙집으로 돌아오니 하숙집 출입문 앞에 군화가 수북이 놓여 있었다. 방문을 열자 방안에 모여있던 학교 관계자 장교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다.저녁까지 돌아오지 않자 내가 정말 간첩으로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대공혐의자로 체포되어 갔기 때문에 까딱 잘못하면 도맷값으로 나와 함께 간첩으로 몰리지나 않을까하여 입 한번 뻥긋할수도 없었다며 김대위 얼굴을 보니 이구동성으로 이제 살것 같다고 토로했다.생사람들 마음 고생시킨 것 같이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정보사령부에서 3개월만에 보직 해임되어 쫒겨나

 

그런데 광주민주항쟁과 관련하여 모진 인연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나는 고등군사반 교육을 마치고 호크미사일 포대 부포대장으로 일년을 보낸후 사령부 작전통제처 작전통제장교로 근무하다 국군정보사령부에 우리 병과로 할당된 대위 직급 공석이 나왔다는 소식을 인사처 관계자로 부터 듣고 자원하여 정보사령부로 전출을 갔다.

 

정보사령부 전출을 희망하게 된 것은 광주학살 관련 내막을 파악하는데 있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보안사를 갈 수 없는 상황하에서 보안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정보사령부에 근무하면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정보사령부 전입후 나는 사령부 내에 배치될 것이란 판단과 달리 정보사령부에서는 지금은 해체되어 없어졌지만 당시 의정부에 위치한 한미야전사령부내 정보단 행정과장 보직을 부여했다.단장은 대령이었다.

행정과장 보직을 마치면 정보사령부내 부서로 배치될 것으로 여기고 한미야사 정보단 행정과장으로 근무한지 3개월만인 어느날 출근하자 주무 과장인 정보과장(소령)이 사령부에서 방공포병대대로 전출명령이 내려 왔다면서 단장님께 전출 신고를 해야 된다고 말했다.

 

너무 황당하여 보직을 마치려면 9개월이 남았는데 갑자기 무슨 전출명령이나고 항의하니 정보과장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면서 자세한 것은 신고할때 단장님이 말씀해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을 피했다.

 

보직을 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해임되면 진급에 결정적으로 불리할 정도로 장교 생활에 치명적이다.나는 이미 보안사에서 간첩혐의로 조사를 받은바 있어 진급 문제등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하지만 3개월만에 보직해임 전출은 기분이 좋을리가 없었다.

 

단장실에 전출 신고를 하려고 들어가자 단장은 대뜸 내손을 움켜 잡더니 갑자기 존대말까지 써가며 "김대위,언제까지 군생활을 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남은 군생활 동안이라도 제발 자중하시고 조용히 보내시는게 어떠하시겠나"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단장은 사령부로부터 김대위에 관련된 사항을 연락을 받았다면서 내 사무실 가방속 자료를 확인하여 이미 사령부에 보고됐고 바로 전출 명령이 내려 왔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보안사 조사받은 사실을 통보받은 듯 했다.

 

단장의 말이 끝나자 정보과장이 내가 편입했던 성대 행정학과 학부과정 강의를 들으려 자리를 비운사이 내 사무실을 샅샅이 뒤졌다는 것이었다.내 가방 속에는 당시 광주학살 책임자인 대통령 전두환에 대한 심판 의지를 담긴 자료가 들어 있었다.

 

나는 앞서 언급한 세미나 이후 1985년 초 국가안보와 나라를 위해 광주학살의 총책임자인 정치군인 전두환을 처단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 전역후 계획에 대해 A4용지 200장 규모 분량으로 작성하여 항상 가방에 넣어 휴대하고 다녔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시간에 쫒기면서 그 가방을 사무실에 놓아두고 다른 가방을 들고 나갔더니 정보과장의 손에 들어갔고 공식화할 경우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모른다는 판단하에 정보사령부와 단장이 비밀 협의하에 자료 내용은 덮어두고 전출을 보내는 것으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면서 정보과장은 내가 작성 해 놓은 자료는 내용만 확인했을뿐 가방에 그대로 두었다면서 김대위가 불에 태워 버리는게 좋지 않겠느냐고 조언을 해 주었다.나는 결국 3개월만에 정보사령부로부터 쫒겨났다.

 

나는 정보사령부에서 강제 전출되어간 방공대대에서 조용히 생활하다 전역해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주위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보안사 조사,정보사 보직해임이 경력상 정상적인 군 생활을 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대대 정보장교 보직을 받아 근무한지 한달쯤 지날무렵 대대장이 포대장으로 나가는게 어떠냐고 물었다.나는 즉시 포대장을 맡을 생각이 전혀 없으며 대대 참모로 계속 근무하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그러나 대대장은 거의 매일 장교 생활의 꽃이 지휘관이라면서 거듭 포대장 보직을 받으라고 권하였다. 당시 3포대장이 후임자가 오지 않아 6개월을 초과 근무하고 있었다.

 

지휘관은 교육훈련 등 지휘성과가 좋으면 보람이 있지만 부대 성적이 좋지 않고 사고가 빈발하면 하루하루가 지옥같은게 지휘관이기도 했다.

 

3포대는 창설 이후 모든 면에서 뒤처져 있었다.꼴찌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3포대가 반짝 빛을 발한적이 딱 한번 있었는데 3년전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이 소위 임관후 소대장으로 배치되었을 때였다.

 

당시 전투력 평가나 상급부대 검열은 실력보다 평가관이나 검열관의 주관이 개입되어 최우수 부대,꼴찌가 좌우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수검부대는 교육훈련 검열 평가관, 검열관과의 인간관계나 예우에 신경을 더 쓰는 경우가 많았고 이와같은 사적인 인관관계가 작용하여 의외의 평가 결과가 나와 잡음과 불만이 야기되기도 했다.

 

박지만 소위가 소대장으로 배치되자 육본,군사령부,군단,여단 등 상급부대에서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그래서인지 전투력평가시 검열관들이 후한 점수를 주어 포대가 난생 처음 1등을 했었지만 박지만이 소대장을 마치고 전출간후에 꼴찌로 원위치 했다고 한다.

 

워낙 성적이 좋지 않다고 소문이 나서인지 3포대장으로 오려는 장교가 없으니 포대장을 마치고 소령 진급을 위해 다른 보직 경력을 쌓아야 하는 현직 포대장으로서는 속이 탈 수 밖에 없었고 전입 온 나를 후임 포대장으로 보내 달라고 집요하게 대대장께 건의를 했던 것 같다.

 

적과 싸워 이 길수 있는 무적필승 부대 육성...아직도 의지는 확고하다

 

대대장과 3포대장의 권유가 계속되자 그렇다면 3포대를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최고의 부대로 만든 멋있고 성공적인 포대장이 되어 군복을 벗는다면 껄끄러운 간첩조사,정보사 보직해임을 상쇄하고 사회로 나갈 수 있겠다 싶어 포대장을 맡기로 마음을 정했다.

 

포대장으로 부임하여 포대장 임기를 마칠때까지 포대원을 부하로 생각지 않고 전우,친동생으로 생각하고 행동으로 실천했다.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전투력 최고 무적필승 부대로 만들기 위해 인사,교육훈련,정신전력,작전,사기복지 문야 120개의 사업계획을 세워 추진해 나갔다.

 

부대 전우들에게 적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오로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기전술 연마에 바탕한 전투실력이라고 선언했다.

 

전투력평가,검열시 평가관 검열관에게 선물,향응을 통해 좋은 성적을 받으려 한다면 우리 자신과 부모형제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나라를 망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민의 혈세로 지급된 실탄,포탄 한발 모두를 실력으로 명중시켜 적을 제압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교육훈련에 전력을 경주했다.

 

그러면서 부대원의 건강과 애로사항 해소,무사 전역에 지휘역량을 집중하였다.부대원이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즉시 통합병원에 진료를 받게하고 심한 경우 입원시켰다.꾀병 환자도 무조건 병원 진료를 받도록 했다.

 

포대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매월 전 부대원을 신상면담을 하고 외박 휴가 출발 복귀 신고시도 직접 면담을 하고 면담시 계급관계상 말 못한 점이 있음을 고려 포대장 지휘결함,본인 고민 애로사항,동료전우 고민애로사항,공통애로사항,동료 미담,부대 발전사항,기타 사항을 포함한 1인1통 포대장과의 대화 편지를 매월 1회 제출토록하여 조치해주는 과정을 통해 부대원 전원의 건강,이성고민,부모형제 고민 등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대장,선임하사 등 간부 일부 부대원의 건의가 아니더라도 꾀병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잔꾀 농뗑이꾼으로 보지 않고 꾀병도 마음의 병으로 여기고 아프다면 전혀 의심하지 않고 병원 진료를 보냈다.

 

부대원의 겅강에 신경을 쓴 이유는 유사시 전투에 임했을때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건강이 필수라는 점,부대원이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지만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친혈육처럼 보살펴야 한다는 점,부대원의 부모형제가 건강히 군복무를 마칠 수 있도록 포대장을 믿고 맡겨 놓았는데 병이 들거나 다치게 한다면 부대원 부모님께 죄를 짓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시간이 급하고 주말에 군병원 진료가 어려울 경우 주변 민간 약국에가서 약을 지어 주거나 민간 병원 진료를 받게하였다.부모님 건강을 고민하는 부대원에게는 직행버스 표를 끊어 약소하지만 약 구입비를 들려주어 외박을 보내기 까지 하였다.

 

병원 진료 부대원 숫자가 다른 포대의 2~3배에 달하였다.연말 1년 부대 성과 분석과 새해 사업계획을 주제로 열리는 단위대장회의시 진료환자가 너무 많은데 대해 대대장이"3포대는 왜 이리 환자가 많은가"라고 지적할때 "저희 포대원은 모두 건강합니다.조금이라도 아프면 무조건 입원진료를 한 결과입니다.지금 당장 전쟁이 발발한다면 저희 포대는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할 있습니다"고 답변한 때가 있었다.

 

또 포대장 재임 기간 단 한 명도 부대원을 징계하여 영창을 보낸바가 없다.다른 포대는 일벌백계 운운하며 1주일,10일,최대 15일 영창을 심심찮게 보냈지만 아무리 큰 잘못이 있는 경우도 영창을 보내지 않았다.

 

영창을 보내지 않은 것은 이 또한 부대원이 잘못해도 내 친동생이라면 과연 영창을 보낼 수 있겠는가 하는 관점에서 보낼 수 없었고 일단 영창을 가면 전역이 영창 가는 날짜만큼 늦어진다는 점,영창을 갖다왔다는 사실이 인생에 짐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는 점,그리고 실수나 잘못이 일부러 저지른게 아니고 잘 몰라서,순간적인 부주의, 더 잘해 보려다 나온 실수가 대부분이란점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포대장인 내가 교육,관리감독이 부족하여 실수와 잘못이 나오게 했다는 소신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매년 한미연합 팀스피리트 훈련을 해 왔는데 팀스피리트 훈련 부대로 선정되어 포대를 이끌고 장호원과 충북 음성 사이 남한강 공군 전투기 폭격훈련장으로 출동하여 훈련을 마치고 복귀한 몇달후였다.

 

포대본부에서 4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도로 능선에 작전진지가 있었다.그런데 어느날 국방부 검열단이 강원도 방면으로 검열을 나가다가 도로변에 소규모 진지가 보이자 불시에 들어와 진지를 점검 한 모양이었다. 국방부 검열단이 내무반을 점검하던중 공군 전투기용 불발폭탄 3발이 나온 것이었다.당시 진지 선임하사는 국방부 검열단이 지나다 들렀다는 보고만 했지 처벌을 받을까봐 그랬는지 폭탄지적 사항을 보고하지 않았다.

 

다음날 대대장으로부터 날벼락이 떨어졌다.국방부에서 육본,군사령부,군단으로 불발폭탄 은닉 문제에 대해 조치와 함께 엄정 문책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며 당장 관련 병사 모두 징계 영창 조치하라고 엄명하였다. 나는 대대장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징계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불발폭탄은 팀스피리트 훈련장이었던 공군 사격장에서 제대후 집에 가져가 기념품으로 만들기 위해 몰래 가져와 숨겨 놓은 것이었다.

 

공군 사격장에는 불발탄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자세히 보니 실제 폭탄 불발탄이 아니고 모의 훈련탄이었다.터질 위험은 없었지만 외형은 실제 폭탄과 꼭 같아 국방부 검열단들이 위험하다고 판단할 수 있었거나 군기가 빠져 있다고 여기기에 무리가 없었다.

 

내가 징계를 하지 않고 버티자 대대장은 군단에서 국방부에 조치 결과를 보고해야한다고 난리라며 목청을 높였다.당장 대대로 들어오라는 지시를 받고 대대로 들어가 대대장께 부대원들이 불발폭탄을 들여온 것은 잘못이지만 가장 큰 잘못은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확인 감독을 못한 포대장의 잘못이므로 포대장인 제가 먼저 처벌을 받은후에 부대원에 대한 징계를 하는게 옳다고 생각한다며 포대장인 저에 대한 징계부터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대대장은 말도 안되는 고집을 피우냐며 영창 며칠 보내는 것으로 신속히 징계하라고 하였지만 끝까지 지시를 받들 수 없다고 하자 군단장님까지 단단히 화가 났다고 하시기에 그러면 제가 군단장님을 찾아가 말씀드리겠다고 하면서 일어서니 그러지 말고 일단 포대로 돌아가 대기하라고 말씀하셨다.

 

열흘쯤 지나니 대대장께서 군단에서 국방부에 포대장이 자신을 먼저 처벌해달라며 버틴다고 보고했는지 앞으로 재발하지 않도록 확인감독을 철저히 하라는 지시로 마무리 되었다고 말씀하셨다.국방부 징계지시도 정면돌파하였는데 다른 건으로 영창을 보낼일이 없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친형제처럼 똘똘 뭉친 결과 우리포대는 대대,여단,군단,군사령부 전투력 최우수부대를 오로지 실력으로 휩쓸며 부대표창을 17회나 수상할 정도로 무적필승 최고의 부대로 우뚝 섰다.

 

군복을 벗을 사람이었던 상태에서 포대장을 마치면서 소령으로 진급하였다.소령 진급후 맡은 나이키 미사일 포대를 또 다시 육본 전투력 검열에서 육군 최고부대로 만들어 놓고 진급 4년 되던해 광주민주항쟁,영호남 지역감정과 관련한 내 나름의 계획을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해 자진하여 군복을 벗었다.

 

전역후 얼마 안돼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찾아 영령들 앞에 다짐을 하고 실천의 일환으로 지역감정 관련 책을 내고 조직을 꾸려 행동에 나서기도 하였지만 능력부재로 이루어 낸 것은 너무 초라하다.

 

그러나 아직 의지는 확고하다.끝내 좌절할 경우 과정을 담은 보고서라도 낼 참이다.광주민주항쟁 40주년을 맞아서도 늘 이날이 오면 그렇듯 부끄러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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