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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불요불굴의 자주독립운동가 이화림 선생

문해청 | 기사입력 2021/02/13 [00:05]

[인물] 불요불굴의 자주독립운동가 이화림 선생

문해청 | 입력 : 2021/02/13 [00:05]

1905년 1월, 이화림 선생은 평양시 경찰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집안은 가난했지만 꿈마저 가난하지는 않았다.

선생의 오빠인 이춘성, 이춘식 선생은 독립운동가였고 이에 영향을 받아 평양 3.1운동에 가담했다.

25살에 중국 상하이로 넘어간 그녀는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 그곳에서 사격과 무술을 배운 후 일본 밀정을 유인해 살해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 자주독립운동가 이화림 선생

1932년 4월 29일 아침, 중국 상하이 홍구공원. 일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 행사가 열리는 이곳에 말쑥한 스프링 코트를 입고 도시락과 물 통을 든 한 남자가 들어섰다. 바로 윤봉길 선생이었다. 윤봉길 선생은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일본거류민단장을 즉사시키고, 노무라 중장의 두 눈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우에다 중장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이외에도 몇 사람에게 중상을 입혔다. 윤봉길 의사가 거사한 '상하이 점령 축하식'이 열리던 전날, 윤봉길과 이화림은 부부로 가장하고 기념식이 열렸던 훙커우 공원을 미리 답사했다.

실제 거사날 1백m쯤 뒤에서, 양장 차림의 젊은 여인이 윤봉길 선생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인은 윤봉길 선생이 공원 안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사라졌다.

앞서 몇 달 전, 일본에서 미완의 거사(1932년 1월 8일)로 끝난 이봉창 의사를 도운 것도 이 여인이었다. 이 여인이 바로 독립운동가 이화림 선생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왜 우리에게 잊히고 말았는가.

첫째  "<백범일지>에 이화림 이야기가 빠진 것은 그녀에 대한 김구 선생의 인간적 서운함이 작용했던 것 같다. 백범에게 있어 비서이자 '한인애국단'의 핵심이었던 이화림의 존재는 컸다.

이화림은 재정난을 겪고 있는 임시정부를 위해 나물장사, 빨래, 수놓기 등을 하면서 활동 경비를 지원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밀정 처단이나 연락활동 등 주어진 업무를 충실히 수행해 김구 선생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던 그녀가 테러만으로는 조선의 해방, 자주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신념에 따라 백범의 만류를 뿌리치고 혁명의 기지 중국 광저우로 떠났으니 백범의 좌절이 얼마나 컸을까? 더구나 이화림은 백범이 싫어하는 좌익계열의 항일운동 기지로 갔다는 점도 이화림을 회고록에서 지우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사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 <숨어 있는 한국 현대사 2> -  본문 중에서

둘째 이념의 문제로 인한 문제다. 그녀는 분명히 좌익계열의 독립운동가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 교과서와 한국사시험, 공무원시험 등에서 언급된 적이 없고, 국내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역사를 조금 더 통시적으로 바라보고, 후손으로서 그들의 업적을 평가하기보다, 감사함과 존경을 담아 예우하는 제도의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자료 정상규 / 정리 문해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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