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판사판 공사판(理判事判 供辭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뭘 하다가 잘 안되거나 막다른 지경에 이르면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판과 사판은 ‘화엄경’에서 나온 말로서 세계의 차원을 이(理)와 사(事)로 설명하는데, 이판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의 세계에 대한 판단이며 사판은 눈에 보이는 현상 세계에 대한 판단이라고 합니다.
‘이판사판’ 자체는 불교용어가 아닌 합성어이지만 이판과 사판은 불교용어입니다. 국어표준사전에 이판사판은 ‘막다른 데에 이르러 어찌할 수가 없게 된 지경’이라고 합니다. 뾰족한 방법이 없어 막다른 상황에 도달했음을 일컫는데, 조선시대 불교 승려의 두 부류인 이판승(理判僧)과 사판승(事判僧)을 합쳐서 부르는 말입니다.
사찰을 존속시키는 것과 불법의 맥을 잇는 방향으로 승려들은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일부 승려들은 폐사(廢寺)를 막기 위해 온갖 고난을 견디면서 사찰의 유지에 헌신했습니다. 이와는 달리 속세를 피해 운둔하면서 참선과 독경으로 불법을 이은 승려도 많았습니다. 전자를 사판승(事判僧) 혹은 산림승(山林僧)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이판승(理判僧) 혹은 공부승(工夫僧)이라고 했습니다.
일부 사판승에는 교리에 어두운 범승이 있었고, 이판승은 공부에만 치중함으로써 불교의 외형적 발전에 그다지 큰 기여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양자는 상호 보완의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폐사를 막음으로써 불법의 명맥을 이은 것은 사판승의 공로이고, 부처님의 혜광(慧光)을 전하고 불법을 이은 것은 이판승의 공로였습니다.
오늘날 이판사판 공사판이란 말은 막다른 지경을 일컫는데, 과거 이판승과 사판승의 협의체인 공사판과는 전혀 다른 뜻입니다. 그러나 당시 억불숭유를 헤쳐 나가는 스님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점에서 역경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넘어서 나아가는 지혜와 용기로 '이판사판 공사판'이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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