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가 망한 후 요양(랴오양)은 한반도에서 잊혀진 땅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그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명·청 시대까지도 랴오양에는 고구려 왕궁 터, 절터 등 많은 유물과 함께 고구려 유민의 후예들도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명대의 조선 사신들이 랴오양에서 듣고 본 것들을 기록한 <조천록>, 청대의 조선 사신들이 남긴 <연행록> 등에 그런 내용이 간헐적으로 실리기도 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대표적인 경우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평양이나 패수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시기마다 여러 군데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라고 통탄했다. 랴오양이 과거의 평양이었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이던 것을, 요(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랴오양현)이다.” 지금 랴오양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전혀 없을까? 2월 22일 오전, 별 기대없이 찾은 랴오양 박물관에서 크게 전시된 <요사> 지리지의 한 대목을 발견했다. “발해의 왕성인 이 곳은 옛 평양성이 있던 곳으로 중경현덕부 자리이기도 하다(遼東盛國忽汗州卽故平壤城也號中京顯德府. 홀한(忽汗)에서 홀은 왕, 한은 성. 즉 왕성이란 뜻).” 평양이라는 이름이 사라진 후 오랫동안 이 곳의 이름은 평양의 앞뒷말을 바꿔 ‘양평(襄平)’이라 불렸다. ----시사in 인용 '요사’ ‘금사’ 인정 안 하는 중국
장수왕이 천도한 고구려 평양성은 북한 평양이 아닌 요양
. 중국에서는 유비와 조조 손권이 다투던 3국 시대가 끝나고 중국인과 북방민족이 뒤엉켜 싸우며 여러 왕조가 명멸하는 위진남북조시대, 일명 5호16국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위진남북조시대는 춘추전국시대만큼이나 전쟁이 잦았다. 동쪽에서 팽창하던 고구려는 서쪽에서 확장하던 모용외 세력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고-연 전(高燕戰)을 벌인 것이다. 가장 강력한 ‘고연전(高燕戰)’은 고구려 고국원왕 때인 342년 전연의 초대 황제 모용황 군의 침입으로 일어났다. 모용황은 아버지가 당한 것을 앙갚음하려는 듯 강력한 공격을 퍼부어 고구려군을 대패시키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아내를 생포했다. 그리고 고구려가 감히 대항할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가져 갔다.
지금 중국 길림성 집안의 압록강가에 가보면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개토태왕의 능을 비롯한 여러 고분과 광개토태왕비, 그리고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사가들은 곳이 고국원왕 때부터 장수왕까지의 고구려 수도가 집안의 국내성이였다고 보고 있다. 그러니까 고국원왕 이전에 본래 고구려 평양성은 요양이였고, 장수왕때 다시 본래 고구려 평양성인 요양으로 천도한 것이 된다.
지리서 [요사]에서 "북위 태무제(A.D 423-452년)의 사자가 (고구려왕 장수태왕이) 기거하는 평양성에 왔는데, 이 곳은 요의 동경(요양)이다. 당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遼東京本此 唐高宗平高麗 於此置安東都護府」遼史地理志 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 東京道... 고구려 평양성은 장안성이라고도 한다...진나라 의희(A.D 405~418년) 후 장수왕은 (요양의) 평양성에 기거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평양성을 점령하였다. 고구려는 (수도를) 동쪽으로 옮겼는데, 압록수(요하) 동남 1000여리에 있는 평양성(국내성)은 전에 (장수왕이 기거하던 요양의) 평양성이 아니다. 本高句驪平壤城 亦曰長安城 漢滅朝鮮 置樂浪玄?郡 此樂浪地也晉 義熙 後 其王高璉始居平壤城 唐征高麗 拔平壤 其國東徙 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 元史地里志 東寧路] 북위시절의 고구려왕은 장수태왕이다. [구당서]에도 "고구려국의 도읍지는 평양성(平壤城)이며, 평양성(장안성)은 漢나라의 옛 땅인 낙랑군(樂浪郡)이다..거리는 경사(京師:서안)로부터 5천리이다"고 기록하고 있다.장수태왕 14년에 천도한 평양성은 현재의 북한평양이 아니라 요양이다. 기자조선의 왕검성이자 고구려 평양성이 존재한 요양을 중심으로 주변지역이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였다는 역사적 사실도 알 수 있다. 광개토태왕이 실현한 동방 무적이였던 고구려 최강성기 때의 장수태왕은 광개토태왕 때 백제로부터 빼앗은 요서지방(遼西地方)을 지키기 위하여 요양으로 천도하기 2년 전인 A.D 425년에 고구려 제후국 수준인 북위(北魏)와 동맹을 맺었고, 북위와 전쟁 가능성이 없어지자, 수도를 집안 국내성에서 요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 요양의 평양성은 고구려의 최후와 함께 했다. 천자국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 발해도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황제국이였다 참고로 장수왕이 천도한 고구려 평양성인 요양은 서-북쪽으로 말들을 사육할 수 있는 초원으로 이어지고 남으로는 요하를 통하여 해양무역을 할 수 있는 바다로 이어지고 식량을 확복할 수 있는 최고의 평야와 고구려로 하여금 찰갑기마국가를 실현하게한 세계 최고의 철강지역인 만주가 있고 중국대륙을 차지할 수 있는 최고의 교통.군사지역이기도 하다. 이런 최고의 지역을 두고 한반도 평양으로 천도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저작권자 ⓒ 국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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