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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북한 평양아닌 요양

북한 평양설은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로 속히 개정해야 한다!

윤복현 | 기사입력 2019/03/17 [11:18]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북한 평양아닌 요양

북한 평양설은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로 속히 개정해야 한다!

윤복현 | 입력 : 2019/03/17 [11:18]



고구려가 망한 후 요양(랴오양)은 한반도에서 잊혀진 땅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그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명·청 시대까지도 랴오양에는 고구려 왕궁 터, 절터 등 많은 유물과 함께 고구려 유민의 후예들도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명대의 조선 사신들이 랴오양에서 듣고 본 것들을 기록한 <조천록>, 청대의 조선 사신들이 남긴 <연행록> 등에 그런 내용이 간헐적으로 실리기도 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대표적인 경우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평양이나 패수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시기마다 여러 군데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라고 통탄했다. 랴오양이 과거의 평양이었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이던 것을, 요(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랴오양현)이다.”


지금 랴오양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전혀 없을까? 2월 22일 오전, 별 기대없이 찾은 랴오양 박물관에서 크게 전시된 <요사> 지리지의 한 대목을 발견했다. “발해의 왕성인 이 곳은 옛 평양성이 있던 곳으로 중경현덕부 자리이기도 하다(遼東盛國忽汗州卽故平壤城也號中京顯德府. 홀한(忽汗)에서 홀은 왕, 한은 성. 즉 왕성이란 뜻).” 평양이라는 이름이 사라진 후 오랫동안 이 곳의 이름은 평양의 앞뒷말을 바꿔 ‘양평(襄平)’이라 불렸다. ----시사in 인용


'요사’ ‘금사인정 안 하는 중국


중국은 하나의 왕조가 끝나면 다음 왕조가 이전 왕조의 역사를 기록했다. 이렇게 25개 역사서가 만들어졌다(통칭 ‘25사’). 그런데 선비족이 세운 북위 등 5호16국 시대의 왕조와 요, 금, 몽골족의 원(元), 여진의 후예인 만주족(滿族)이 건국한 청(淸)은 한족(漢族)의 나라가 아니었다. 한족이 겁낸 적국인데 중국을 지배하고 통치했기에 다음 왕조는 그들의 역사서를 제작했다. 그런데 ‘요사’와 ‘금사’를 제작한 것은 한족이 아닌 몽골족의 원나라였다. 두 사서만 비(非)한족이 만든 것이다(반면 ‘원사’는 한족 왕조인 명나라가 만들었다).



이 때문에 중국 역사학계는 두 사서가 부정확하다며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이 조선과 대한민국에도 전해져 같은 분위기가 형성됐다. 두 사서는 원나라 말기 몽골인인 탈탈(脫脫)의 주도로 급하게 제작됐기에 약간의 오류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중국 역사학계는 이를 이유로 두 사서의 기록을 무시한다. 그러나 제3자인 우리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기술해놓았다고 볼 수 있다.



요는 고려와 세 번 전쟁을 했고, 고려가 고구려를 이은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적국 고려의 선조인 고구려와 고조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으니 이들의 기록은 더욱 객관성을 갖는다.



‘요사’에서 주목할 부분은 요나라 지리를 정리한 ‘지리지’다. 그중에서도 요나라 동쪽 지방인 ‘동경도’ 부분이다. 요나라는 동경 서경 남경 상경 중경의 오경(五京) 제도를 갖고 있었다. 요나라는 동경도(東京道)의 중심인 동경을 지금의 요령성 요양(遼陽)에 뒀다. 그때도 요양은 요양으로 불렸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 편은 요양이 ‘본래 조선의 땅이었다’는 글귀로 시작한다. 조선은 고조선을 가리킨다. 우리의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이 북한의 평양에 있었다고 해놓았는데 ‘요사’에선 도읍지가 요양에 있었다고 밝혀 놓은 것이다.



4군은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다



지리지[요사]는 단군조선의 부단제가 서쪽지역을 다스리는 기자조선(번조선)이 40여 대 왕을 이어오다 중국 연(燕)나라 때 매우 약해져 연나라에 속한 ‘진번’과 ‘조선’이 됐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진나라 진개가 고조선 서쪽지역을 침략하여 2천여리를 차지했다고 사료가 기록한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고조선은 다시 반격하여 서쪽 땅을 회복하였다고 한민족 정통사서인 [환단고기]는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 기자의 후손인 기후가 의병을 일으켜 연나라를 물리친 공로로 중앙국 단제로부터 서쪽지역을 다스리는 번조선의 부단제로 임명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 떄부터 마지막 단제인 기준왕까지를 기자조선이라고 부른 것이다.



연나라는 중국 역사에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때의 연은 진시황의 진(秦)과 다투다 패배한 ‘전국 7웅’ 중의 하나인 연이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은 진시황이 죽자 곧 무너지고, 항우와 유방이 다투다 유방이 승리해 한(漢, 서기전 206~서기 220)나라가 등장했다. 한 유방이 건국공신들을 죽일 때 동쪽으로 ㄷ망한 자가 한나라 노관의 부하인 위만인데 위만이 기자조선에 거짓투항 후에 기준왕을 몰아내고 권좌를 차지하니 위만조선인 것이다.



한나라와 위만조선은 당연히 사이가 나빴다. 이 때문에 유방의 손자로 7대 황제가 된 유철(한 무제)이 해륙(海陸)으로 맹공격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4군을 세웠다. 지리지[요사]도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평정하고 그 땅을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4군(郡)으로 삼았다고 밝혀 놓았다. 그렇다면 한4군은 요양을 중심으로 한 만주에 있었던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한4군이 북한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중북부에 있었다고 가르치고 배워왔다. 당장에 식민사관으로 기록된 국사교과서의 고대사 내용을 개정해야하는 것이다.




장수왕이 천도한 고구려 평양성은 북한 평양이 아닌 요양


거란의 선조는 고구려와 혈투를 벌이고 패배해 복속됐다가 고구려가 무너진 후 세력을 형성해 요나라를 건국하고 고구려를 이은 대진국 발해를 멸망시켰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 발해에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리다. 따라서 이들이 고구려와 관련해서 거론한 지리 기록만큼은 정확하다고 봐야 한다. ‘요사’ 지리지는 고구려와 선비족 간의 싸움을 소재로 고구려 수도인 평양의 위치를 거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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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유비와 조조 손권이 다투던 3국 시대가 끝나고 중국인과 북방민족이 뒤엉켜 싸우며 여러 왕조가 명멸하는 위진남북조시대, 일명 5호16국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위진남북조시대는 춘추전국시대만큼이나 전쟁이 잦았다. 동쪽에서 팽창하던 고구려는 서쪽에서 확장하던 모용외 세력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고-연 전(高燕戰)을 벌인 것이다.





가장 강력한 ‘고연전(高燕戰)’은 고구려 고국원왕 때인 342년 전연의 초대 황제 모용황 군의 침입으로 일어났다. 모용황은 아버지가 당한 것을 앙갚음하려는 듯 강력한 공격을 퍼부어 고구려군을 대패시키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아내를 생포했다. 그리고 고구려가 감히 대항할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가져 갔다.



이에 고국원왕이 굴복해 신하가 되겠다고 하자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주고 어머니도 보내 주었다. 그리고 고국원왕을 ‘제후국 고구려’의 왕으로 임명했다. [삼국사기]는 전연의 공격을 받기 전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이었는데 침공 후인 343년 고국원왕이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천도했다고 적어 놓았다.



지금 중국 길림성 집안의 압록강가에 가보면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개토태왕의 능을 비롯한 여러 고분과 광개토태왕비, 그리고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사가들은 곳이 고국원왕 때부터 장수왕까지의 고구려 수도가 집안의 국내성이였다고 보고 있다. 그러니까 고국원왕 이전에 본래 고구려 평양성은 요양이였고, 장수왕때 다시 본래 고구려 평양성인 요양으로 천도한 것이 된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동경으로 삼았던 요양은 장수태왕이 고구려 평양성으로 삼은 지역이다. 기존 사학계에서는 아직도 장수태왕이 천도한 평양성이 북한의 평양으로 암기하듯 인식하고 있는데 정부[국사편찬위]는 조속히 국사책에서 내용을 개정해야 하겠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장수왕기 15년조]에 의하면 "장수왕(長壽王) 15년(A.D 427년) 수도를 평양(平壤)으로 옮겼다." 十五年移都平壤」三國史記 高句麗本紀 .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장수왕 15년(A.D 427년)에 수도를 요사지리서의 기록에 따르면 압록수(요하)의 동남쪽 1천여리에 위치한 평양 동황성(집안의 국내성)에서 요양 평양성으로 옮겼다는 의미다.



지리서 [요사]에서 "북위 태무제(A.D 423-452년)의 사자가 (고구려왕 장수태왕이) 기거하는 평양성에 왔는데, 이 곳은 요의 동경(요양)이다. 당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遼東京本此 唐高宗平高麗 於此置安東都護府」遼史地理志 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 東京道... 고구려 평양성은 장안성이라고도 한다...진나라 의희(A.D 405~418년) 후 장수왕은 (요양의) 평양성에 기거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평양성을 점령하였다. 고구려는 (수도를) 동쪽으로 옮겼는데, 압록수(요하) 동남 1000여리에 있는 평양성(국내성)은 전에 (장수왕이 기거하던 요양의) 평양성이 아니다. 本高句驪平壤城 亦曰長安城 漢滅朝鮮 置樂浪玄?郡 此樂浪地也晉 義熙 後 其王高璉始居平壤城 唐征高麗 拔平壤 其國東徙 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 非平壤之舊」 元史地里志 東寧路]


북위시절의 고구려왕은 장수태왕이다.


[구당서]에도 "고구려국의 도읍지는 평양성(平壤城)이며, 평양성(장안성)은 漢나라의 옛 땅인 낙랑군(樂浪郡)이다..거리는 경사(京師:서안)로부터 5천리이다"고 기록하고 있다.장수태왕 14년에 천도한 평양성은 현재의 북한평양이 아니라 요양이다. 기자조선의 왕검성이자 고구려 평양성이 존재한 요양을 중심으로 주변지역이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였다는 역사적 사실도 알 수 있다.


광개토태왕이 실현한 동방 무적이였던 고구려 최강성기 때의 장수태왕은 광개토태왕 때 백제로부터 빼앗은 요서지방(遼西地方)을 지키기 위하여 요양으로 천도하기 2년 전인 A.D 425년에 고구려 제후국 수준인 북위(北魏)와 동맹을 맺었고, 북위와 전쟁 가능성이 없어지자, 수도를 집안 국내성에서 요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 요양의 평양성은 고구려의 최후와 함께 했다.



천자국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 발해도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황제국이였다


참고로 장수왕이 천도한 고구려 평양성인 요양은 서-북쪽으로 말들을 사육할 수 있는 초원으로 이어지고 남으로는 요하를 통하여 해양무역을 할 수 있는 바다로 이어지고 식량을 확복할 수 있는 최고의 평야와 고구려로 하여금 찰갑기마국가를 실현하게한 세계 최고의 철강지역인 만주가 있고 중국대륙을 차지할 수 있는 최고의 교통.군사지역이기도 하다. 이런 최고의 지역을 두고 한반도 평양으로 천도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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