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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와 가족, 또 내가 잊고 있었던 고마운 것들

권종상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0/04/26 [00:29]

코로나 바이러스와 가족, 또 내가 잊고 있었던 고마운 것들

권종상 논설위원 | 입력 : 2020/04/26 [00:29]

두 아들들이 이번 학기에는 집에서 수업을 받고 있지요. UW이라는 학교가 '방송통신대'가 되어 버린 모습을 보면서 이런 경험들을 세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누고 있을 거라는 게 참 묘한 기분입니다. 이제 이른바 '면대면 접촉'은 과거의 일이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듭니다. 최근 들어 여행 상품들이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으로 쏟아져 나오지만, 누가 여행을 가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이 때문에 겪는 뜻밖의 즐거움들도 있습니다. 아들놈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아이들이 기르던 고양이 두 마리가 우리집으로 들어온 것도 그런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처음 며칠은 서로 하악질들을 해 대더니, 지금은 조금 친해진 것 같습니다. 비수와 미미라는 이름을 가진 이 고양이들은 처음엔 눈치들을 보더니, 지금은 어디 안 올라가는 데가 없고 생선 살 발라놓은 걸 다 먹어치워 버리고... 원래 텃세를 부리던 우리집 고양이 두 마리들도 조금씩 이 상황에 익숙해지는 건 좋은데, 서로의 나쁜 버릇들을 배우고 있군요.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더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밖의 즐거움들이 있습니다. 어제 지호가 갑자기 '스미르노프 아이스'를 마시고 싶다더니 차를 몰고 마켓에 다녀 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지호의 손엔 제가 마실 라거 맥주 식스팩과 열 여섯 조각의 프라이드 치킨과 조조(감자튀김) 같은 것들이 들려 있었습니다. 아, 아들 잘 키워 놨구나.

지호와 지원이도 술을 마시면 재롱들을 떱니다. 어제는 심지어는 아내도 지호가 사 온 '마이크 하드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술이 올라 얼굴이 발개지더군요. 어찌나 농담따먹기 하면서 깔깔대고 웃었는지 꽤 즐거웠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이 아니었다면 쉽게 가질 수 없는 기회이긴 했지요. 지호는 아빠가 오랜만에 라거를 마시고 싶다는 말을 살짝 던졌는데, 하와이에서 나오는 '코나 브루어리'의 라거 맥주를 가져 왔더군요.

IPA가 한참 인기 있었고, 실제로 저도 그런 스타일의 맥주를 좋아하지만, 요즘 이곳은 조금 더워지면서 시원하게 마시면 갈증이 싸악 가시는 라거 맥주가 당길 때가 생기더군요. 게다가 여기에 튀긴 닭이라. 아이들과 떠들면서 이렇게 맥주 한 잔 하며 가족애를 다지는 것, 게다가 닭고기 찢어주면 열심히 먹는 고양이들과 함께 어울려 평일 오후를 보낼 수 있는 것 자체가 코로나가 가져다 준 뜻밖의 선물입니다. 아, 아들놈이 사준 술을 마시는 이 이상하면서도 즐거운 기분은 덤이구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법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이런 즐거운 기분을 갖고 평일 저녁을 보낼 수 있는 건 사실 제가 이번 사태로도 경제적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저는 감사할 것들 투성이인데, 참 오랫동안 감사해야 할 많은 것들을 잊고 살지는 않았던가 싶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코로나바이러스는 그런 것들에 대해 나에게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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