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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과 초토화 작전...전쟁영웅 아닌 양민 학살 원흉

권종상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0/06/05 [11:49]

백선엽과 초토화 작전...전쟁영웅 아닌 양민 학살 원흉

권종상 논설위원 | 입력 : 2020/06/05 [11:49]

백선엽은 박정희에겐 은인과 같은 존재죠. 남로당 활동으로 인해 군에서 축출당하고 사형선고까지 받았지만, 자기 조직의 계보도를 그리고 빠져나와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을 받고, 자기가 발설한 동지들은 모두 죽음에 이르게 만든 빨갱이 출신 박정희. 그에게 다시 기회를 준 것이 백선엽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고, 독립군들을 때려잡은 과거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해방된 조국의 군문을 꽉 잡고 있었으니, 대한민국의 군이 제대로 그 영이 서질 못했고, 친일 부역의 흔적이 남은 정도가 아니라 그 시초가 친일 부역자들로 채워진 군은 일본군의 악습까지도 모두 가져왔습니다. 한국군은 대한민국에서 일제의 잔재가 가장 많이 남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지요.

블로그 이웃이면서 페친이기도 하신 이인 님께서 이 백선엽에 관해 명쾌한 글을 남겨주셨습니다. 이런 인간이 국립묘지에 묻히겠다 하는 걸 보면서 기가 막히셨던 모양입니다. 함께 읽어보고 나눌만한 명문이어서 제가 퍼 날라도 되겠냐고 요청을 드렸고 감사하게도 흔쾌히 응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일독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백선엽 같은 인간이 국립묘지에 묻힌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지금 국립묘지에 묻힌 친일 부역 매국노들도 반드시 파묘 이장하여 새로운 나라의 모범을 세워야 할 판에.

이인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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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에서... 블로그.

작성자: 이인

원문주소: https://yiin123.blog.me/221989658019

​6.25 전쟁의 영웅이라는 백선엽 장군은 초토화 작전의 장인이라고 한다. 그가 올린 전과의 대부분은 초토화 작전이었다는데, 문제는 이 초토화 작전이란 게 다른 말로 '양민학살'이란 것이다.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했던 징기스칸은 초토화 작전의 명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일대인 당시의 '호라즘'제국을 항복의 권유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하여 쳐들어 가 전 국민을 학살한 것도 모자라 동식물 까지도 멸살을 시켜 풀 한포기 자라나지 못하는 황무지로 만들어 버렸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프간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은 산지가 전부 민둥산에 고원절벽이다. 설마 그게 800년 전에 징기스칸 탓일 리는 없고, 아프간이라는 나라의 국토 대부분이 뭔가가 자라나기에는 그다지 적합한 땅이 아니었는 듯.

그런데 이 대목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지금의 전쟁 수행 능력, 적군을 살상하는 기술은 말 달리며 활을 쏘아 날리던 800년 전의 징기스칸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해 있다. 그럼에도 왜 소련군과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지 못했을까? 정답은 저널리즘의 발달에 있다. 2차 세계 대전과 바로 연이은 한국전쟁은 실시간 중계란 게 없던 시절이다. 종군기자가 사진과 함께 송고한 기사는 필름은 배나 비행기를 타야 했고, 기사는 무선 전신국을 거쳐야 했다.

총탄이 빗발치는 사건 현장에서 취재된 기사는 기자의 책상에서 한번 탈고가 된 후에 안전한 후방으로 보내져야 그곳에 있는 전신국에서 본국으로 송고가 되었던 것이다. 이 때, 기사는 군의 관할 구역에서 검열을 당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 수 많은 한국전쟁 당시의 국군과 미군의 양민학살 기사가 오로지 미정보부 기밀문서로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전쟁은 실시간 TV 중계가 되는 시대에 치러진 전쟁이었다. 영화 '우리는 군바리였다 we were soldiers'에서 전투가 승리로 끝나자 헬기에서 취재진들이 카메라와 마이크 등의 방송장비를 들고 쏟아져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미국 내 반전여론에 불을 붙였던 사건이 '케산 전투'의 치열함이 여과 없이 방송을 탔던 것인데, 그 끔찍한 전쟁의 참상을 안방에서 TV로 목격한 미국 시민들은 남의 나라 전쟁에 왜 우리네 아들, 아빠, 남편, 동생들이 끔찍한 죽음을 당해야 하냐며 전쟁을 주도했던 위정자들에게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아프간 전쟁에 있어서도 만일 미군과 소련군이 징기스칸의 군대가 했던 것처럼 했다면 소련군은 미군에게 참전의 기회를 주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다만 누군가 촬영한 대학살의 참상이 전 세계 사람들의 안방에서 방영되고 있었을 듯...

제국주의 일본이 전쟁을 일으켜 중국 대륙을 침략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시절, 만주와 조선의 국경지대에는 우리의 독립군이 활약하고 있었다.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 처럼 일본군을 상대로 크고 작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작전지역에서 후퇴해 결국은 일부는 중국군에 편입되거나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일본군 독립군 토벌대가 벌인 작전이 바로 이 초토화 작전이었고 그 작전이란 민가와 경작지에 불을 지르고 부녀자를 강간하고 죽이고 애 어른 가릴 것 없이 마을 사람들을 전부 죽여 버렸던 것이 간도특설대의 독립군 토벌의 실상이었다. (영화 봉오동 전투에도 나온다)

백선엽이 간도특설대 일본군 장교로서 저지른 짓이 바로 같은 나라 사람을 상대로 한 참살의 도륙과 강간과 약탈이었다. 그리고 백선엽은 6.25 때, 별을 단 국군 지휘관으로서 일제가 조선인 독립군을 상대로 했던 것과 같은 작전을 실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CIA 기밀문서 해제로 드러나고 있는 끔찍한 양민학살.... 이를 두고 어찌 이 나라 사람 중에 누가 백선엽을 6.25의 전쟁영웅이라 할 것인가? 양민학살의 책임자이자 원흉이라 해야 마땅할 터인데?

이런 자가 늙어 죽을 때가 되니 뻔뻔스럽게도 국립묘지에 묻히고 싶다 하는데, 백선엽 이 자가 죽어 묻힐 곳은 이 나라 강토 어디에도 없다. 이 자의 작전지휘 때문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해 어딘 가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못한 채로 땅속에 묻혀 있을 피해자의 유해처럼, 백선엽이 죽어 남긴 시체는 이 땅 아무데나 내던져 져 새가 뜯어 먹고, 쥐가 갉아 먹고, 물고기가 훑어 먹게 하여 자신이 지은 죄의 천만분에 일, 백만분의 일이라도 속죄케 해야 한다.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도 철면피 처럼 순국선열과 같이 묻히기를 바라다니.

백선엽은 6.25 때 백선엽의 작전지역에 백선엽 증오비를 세워 온갖 짐승이 쪼아 먹고 남긴 백선엽의 유해를 같이 전시해야 마땅하다. '이 자리에 이자로 하여금 원통한 죽임을 당한 가엾은 영령은 절대 이자를 용서치 말라'하는 증오의 문귀와 함께....

6.25 전쟁의 영웅이라는 백선엽 장군은 초토화 작전의 장인이라고 한다. 그가 올린 전과의 대부분은 초토화 작전이었다는데, 문제는 이 초토화 작전이란 게 다른 말로 '양민학살'이란 것이다.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했던 징기스칸은 초토화 작전의 명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일대인 당시의 '호라즘'제국을 항복의 권유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하여 쳐들어 가 전 국민을 학살한 것도 모자라 동식물 까지도 멸살을 시켜 풀 한포기 자라나지 못하는 황무지로 만들어 버렸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프간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은 산지가 전부 민둥산에 고원절벽이다. 설마 그게 800년 전에 징기스칸 탓일 리는 없고, 아프간이라는 나라의 국토 대부분이 뭔가가 자라나기에는 그다지 적합한 땅이 아니었는 듯.

그런데 이 대목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지금의 전쟁 수행 능력, 적군을 살상하는 기술은 말 달리며 활을 쏘아 날리던 800년 전의 징기스칸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해 있다. 그럼에도 왜 소련군과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지 못했을까? 정답은 저널리즘의 발달에 있다. 2차 세계 대전과 바로 연이은 한국전쟁은 실시간 중계란 게 없던 시절이다. 종군기자가 사진과 함께 송고한 기사는 필름은 배나 비행기를 타야 했고, 기사는 무선 전신국을 거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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